여의도 정치권에서 '전자입법'이 때 아닌 주목을 받고 있다. 전자입법은 말 그대로 국회의원 본연의 업무인 입법을 전자시스템으로 처리하는 것을 뜻한다. 법안을 작성해 종이문서로 만들고 여기에 동료 의원 서명을 받아 국회사무처에 제출하던 전통적인 오프라인 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입법 작업이 온라인으로 전환된다는 뜻이다.
전자입법은 국회 선진화, 혁신화 차원에서 14년 전에 도입됐지만 존재감이 없었다. 4차 산업혁명 시대 모든 분야가 변화를 외쳤지만 국회는 예외였다.
전자입법이 최근 정치권 화두로 올라선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국회에서 '빠루'와 '망치'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여야 4당과 자유한국당은 지난달 26일 선거법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의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 지정 과정에서 물리적으로 대치했다. 한국당이 국회사무처 의안과를 원천 봉쇄하자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전자입법을 회심의 카드로 활용했다.
헌정 사상 최초로 법안이 전자시스템으로 발의된 역사적 순간이었다. 'IT 강국'이라고 자부하는 대한민국의 정치 현주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순간이기도 했다. 전자입법은 이달 한국당이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하면서 논란을 이어가고 있다.
◇전자입법, 동굴에서 나오다
국회사무처는 2005년 5월 참여정부 전자정부 정책에 발맞춰 전자문서시스템 고도화 작업을 추진, '입안지원시스템(전자입법발의시스템)'을 도입했다. 입안지원시스템은 행정 효율성을 높이고 오프라인에서 처리되던 법안 발의 업무를 온라인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한 시스템이다.
입안지원시스템은 △법률안 입안의뢰 △의안제출 △의안 공동발의 또는 찬성 온라인 서명 △기타 의안관련 정보제공 등 기능을 제공한다.
국회의원이나 보좌진은 국회 인터넷 사이트인 전자문서시스템에 접속해 국회사무처에서 부여받은 자신의 아이디로 로그인한 뒤 입안지원시스템 메뉴를 클릭해 사용할 수 있다. 공동발의 의원(최소 10명 이상) 서명을 삽입하는 절차까지 끝내면 법안은 발의된다. 이후 전자문서시스템을 통해 결재와 공문발송 절차를 거치면 국회사무처 의안과에 접수되는 식이다.
전자입법 시스템은 17대 국회에서 도입됐으나 18대, 19대 국회까지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2000년대 초반 우리나라에 IT 붐이 일면서 정부와 기업 등에선 전자문서를 적극 활용하는 풍토가 조성됐지만 국회는 아니었다.
시스템이 빛을 본 것은 도입 후 14년이 흐른 뒤인 지난달 26일이었다. 백혜련 민주당 의원과 채이배 바른미래당 의원이 입안지원시스템을 이용해 각각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안과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하면서다. 우리 국회의 고질적 병폐인 '물리 국회' '폭력 국회'가 전자입법을 깊은 겨울잠에서 깨어나게 한 것이다.
한국당이 전통적인 오프라인 방식 법안 접수를 막기 위해 국회사무처 의안과 사무실을 점거한 상황이었다. 의안과 내 팩스도 파손됐다. 극한의 대치 상황 속에서 전자입법이 등장했다. 여당인 민주당 백혜련 의원과 보좌진은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전자입법을 시도, 우여곡절 끝에 성공했다. 이를 채이배 바른미래당 의원실에도 알리면서 두 건의 전자입법이 성사됐다.
한국당은 곧바로 반발했지만 국회사무처는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국회사무관리규정에 근거해 '정보통신망을 통한 문서 접수를 허용한다'는 설명이다.
◇정치권 '허례허식' 버려야 전자입법 활성화
법안이 접수됐지만 전자입법 논란은 계속됐다. 한국당은 이달 7일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했다. 국회법과 국회법 해설 등에 관련 근거가 없다는 주장이다. 당 법률지원단장인 최교일 의원은 “전자입법 발의 시스템을 통한 의안 접수를 한 부분 등은 불법”이라고 주장했다. 여야 모두에게 외면 받던 전자입법이 첫 활용 보름도 안 돼 헌법재판소로 향한 것이다.
여야가 전자입법 취지에 대해선 이견이 없지만 정치 이슈와 맞물리면서 기이한 제도로 취급받는 상황에 이르렀다. 한국당은 먼저 법률상 근거를 만들고, 민주당은 실사용 시 불편한 점만 수정하면 된다는 입장이다.
논란에 휩싸인 전자입법이 앞으로 활용 범위를 넓힐 수 있을까. 국회, 정치권 변화만 수반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전자입법이 그동안 국회의원과 보좌진에게 외면 받은 것은 국회 내 보이지 않는 관습 탓이 컸다. 박상철 경기대 교수는 “입법 주체인 국회의원이 정치인이고, 정당에 소속돼 있다 보니 정치 퍼포먼스로 법안을 접수하는 일이 잦았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1호 법안' '여야 협치' '야당 반발' 등 캐치프레이즈를 앞세우면서 상징성을 두다보니 실제 의안과에 법안 서류를 접수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오프라인 방식을 더 선호한 것”이라고 말했다.
4차 산업혁명과 혁신성장을 외치기 전에 국회부터 변하는 것이 필요하다. 박 교수는 “국회 업무 전반에 정보통신기술(ICT)을 활용한 전자시스템으로 업무 효율성을 높이는 한편, 유권자인 국민에게 투명하게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안영국 정치 기자 ang@etnews.com
-
안영국 기자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