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새로운 '반도체 르네상스'를 맞았다. 정부가 팹리스를 중심으로 한 시스템반도체 육성 전략을 발표한 데 이어, 삼성전자도 2030년까지 130조원을 투자해 국내 반도체 생태계를 탄탄하게 만들겠다는 '반도체 비전 2030'을 내놨다. SK하이닉스는 10년간 120조원을 들여 용인에 새로운 반도체 클러스터를 만든다. 여기에 5G(세대) 이동통신, 사물인터넷(IoT), 자율주행차 등 4차 산업혁명 바람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한국은 이를 뒷받침할 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다. 게다가 미·중 무역분쟁으로 중국의 반도체 굴기에 대한 우려도 분산됐다. 작금의 시황은 어렵지만 우리 반도체 산업을 둘러싼 대내외 환경은 그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온 셈이다. 한국 반도체 산업이 퀀텀점프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 국내 반도체 중흥기의 산증인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 회장을 만나 해법을 들어봤다.
“한국을 글로벌 반도체 허브로 만들어야 합니다.”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 회장은 국내외 반도체 회사들이 한국에서 마음껏 연구개발(R&D) 역량을 펼칠 수 있는 '글로벌 반도체 허브'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내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회사들을 육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글로벌 반도체 업체들과 함께 국내 인프라를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려 독보적인 국가 경쟁력을 확보하자는 게 그의 주장이다. 글로벌 업계 기술과 인력들을 반도체 허브인 한국으로 모으면 고갈된 인력이 자연스럽게 양성되고 글로벌 업체보다 경쟁력 우위를 가진 반도체를 더 빠르게 양산해낼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대담=양종석 미래산업부장
-현재 글로벌 반도체 시장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새로운 시장이 열리면서 새로운 반도체가 요구되고 있다. 기존 4G 세대 통신보다 속도가 13배 더 빠른 5G 시대가 개막했다. 데이터 전송 속도가 빨라지며 자연스럽게 이를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이 생겨나고 있다. 증강현실(AR), IoT, 자율주행 등이 그 예다. 특히 AR는 글로벌 업체들이 앞다퉈 투자하면서 성장 가능성이 크다. 일각에서 AR 기술이 오프라인 유통 시장을 다 잡아먹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듯 페이스북, 아마존 등에서 AR에 큰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기존 IT 대기업 외에도 업계를 흔들 중견기업이 출현할 가능성도 커졌다.
그런데 이런 기술들을 구현하려면 새로운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가 필요하다. 기존 AP로는 구현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설계가 들어간 반도체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새로운 AP가 많이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D램과 낸드플래시 수요도 늘어나게 된다. 모바일 시대 이후 반도체 업계에서는 새로운 '찬스'가 생긴 것이다.
-이런 시장 환경에서 한국이 '글로벌 반도체 허브'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글로벌 반도체 경기가 얼어붙은 가운데, 미·중 무역분쟁이 반도체 투자 걸림돌이 되고 있다. 특히 미국 정부가 중국 반도체 굴기에 제동을 걸면서 중국으로 들어가던 반도체 제조업체, 장비회사들이 투자를 멈추거나 현지 기술 개발 계획을 중단한 것이다. 지금 중국 업체들이 반도체를 만든다고 해도, 이들 기술 수준이 낮아 경쟁력이 없는 상황이다.
반면 한국 상황은 중국과 다르다. 현재 글로벌 반도체 업체들 중 투자를 진행하고 있는 곳이 사실상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뿐이고 정부에서도 새로운 반도체 육성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AP, 이미지센서 등을 개발할 수 있도록 시스템반도체 육성 전략을 정부가 새롭게 밝혔고 용인 땅에 SK하이닉스의 대규모 반도체 클러스터가 들어서게 된다. 게다가 5G 기술은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크게 앞서있고, 인구가 이 정도로 밀집돼 있는 나라가 드물다.
요약하면 미·중 무역전쟁이 오히려 우리에게 좋은 투자 환경을 만들어주고 있고, 대규모 소자 기업과 함께 반도체 인프라가 준비돼 있어 해외 업체들이 앞다퉈 한국으로 들어오려고 할 것이다.
-한국에 반도체 허브가 구축되면 국내 업계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이 있는가.
▲세계적인 소자, 장비, 소재·부품업체 연구 설비들이 한국으로 집결하면 인력 시장이 활발해질 것이다. 현재 고갈돼 있는 고급 인력들을 반도체 업계로 유인할 수 있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 부품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도 된다. 한 외산 장비회사의 경우, 한국에 공장설비를 마련해 70% 부품 국산화를 실현했지만, 나머지 30%는 제품군 자체가 없어서 100% 국산화를 달성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세계적인 장비회사와 국내 부품회사가 협력하면 남들보다 더 뛰어난 부품을 빨리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앞선 기술로 만들어낸 부품과 장비를 차후 중국으로 수출하는 데도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빠르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도 된다. 소자업체와 장비회사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기술 공유가 쉽지 않았다면, 허브화가 되면 가까이서 협력해 스케일링 다운(미세화) 속도에 우위를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반도체 업계에 산재한 과제들을 국내 생태계에 있는 기업들끼리 해결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렇다면 이를 실현하기 위해 어떤 점을 선행해야 하는가.
▲우리나라에게 유리한 환경이 조성된 만큼, 한국으로 들어오고 싶어하는 외국계 반도체 회사들에게 인센티브를 주는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또 외국계 회사들이 한국으로 투자했을 때를 고려해 우리나라 반도체 회사들이 이들과 협력하거나 경쟁할 수 있도록 덩치를 키워줘야 한다. 반도체 업체 간 인수합병(M&A)을 유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국가 핵심 기술을 개발하는 기업들이 인수합병을 할 때 세제 혜택을 줘서 덩치를 키우게끔 하는 것이다. 국내 기업은 오너 경영 체제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아 문제가 생길 수도 있지만, 세제 혜택을 준다면 선뜻 동의하는 오너들도 많을 것으로 본다.
-반도체 허브 관련 말씀 중 시스템반도체 전략에 대해서도 언급하셨다. 최근 발표한 정부 전략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궁금하다.
▲새로운 시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실제 4차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삼성전자와 퀄컴이 새로운 AP 경쟁을 벌이게 됐고, 가전 IoT화로 각종 센서 시장도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으로 보이는 데 정부가 시장 분위기를 잘 읽은 것이다. 한번 하고 끝이 아닌 지속적인 수요연계 정책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정책 발표 당일 수요업체와 시스템 반도체 업체 간 맺은 '얼라이언스 2.0' 양해 MOU도 수요 기업 연계를 위한 정책이 지속적으로 나와줘야 활성화가 된다.
공공분야에서 시스템 반도체 수요를 창출하겠다는 방침도 밝혔는데, 산업통상자원부 혼자 해결할 일이 아니라 실제 공공 조달 업무를 담당하는 기획재정부, 조달청과의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
-늘 인력이 문제인데, 이번 전략에서 인력양성 정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다.
▲석·박사 인력 양성에 대한 정책이 구체적이지 않아 아쉽다. 국내 반도체 사업에서 정말 필요한 인력은 '설계 인력'이다. 20조원 이상 드는 반도체 팹을 만들어도 공장 자동화로 인력 고용이 200명 안팎이고 석·박사 교육을 받은 반도체 인력은 턱없이 부족한 게 현재 반도체 인력 시장 상황이다. 반도체 분야에서 학부생만으로는 고용을 창출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왕 인력양성을 시작했으면 석·박사 인력을 키워낼 수 있도록 장기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대기업뿐만 아니라 반도체 업계 전반에 골고루 인재를 배치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 시스템반도체 회사가 고용을 보장하고, 장학금은 정부가 지원하는 방식이다. 정부가 회사와 학계 간 협력하는 국책과제를 늘려서, 대학원 연구 인력들이 국내 시스템 반도체로 자연스럽게 취직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도 방법이다.
-정부가 향후 전략을 이행하면서 고려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정부 지원이 뒷받침된 '스타' 시스템반도체 기업을 육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단타성 정책은 바람직하지 않다. 정권이 바뀌더라도 범부처적으로 전략을 이행할 수 있도록 5개년 계획, 10개년 계획을 기본적으로 만들어서 '꾸준함'을 가져야 한다. 또 시스템 반도체 업체들이 펀드를 잘 쓸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필요하다. 해당 기업 자산 규모 등을 평가하기보다는 회사가 가진 기술의 가치, 기술의 미래성 등을 평가할 수 있도록 펀드 내용을 명문화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은
한양대학교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특허 등록 147건, 특허 출원 307건으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대기업에 기술 이전을 한 국내 반도체 업계 최고 전문가다. 과학기술부 이달의 과학자상, 대한민국특허상 충무공상, 특허청 최대기술이전상 등 수상 이력도 화려하다. 그는 1985년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에 입사해 16년간 몸담았다. 이후 지식경제부에서 차세대메모리개발 사업단장, 국가기술위원회 운영위원, 국가지식재산위원회 위원 등 다양한 기관에서 국내 반도체 사업 발전에 기여했다.
박 회장은 인공지능, 바이오-헬스 IoT, 차세대 반도체, 차세대 퀀텀 닷 디스플레이, 4차 산업혁명 지식재산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 그는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 10대 회장 역임과 함께 산업통상자원부 산업기술보호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고 있다.
정리=강해령기자 kang@etnews.com, 사진=박지호기자 jihopress@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