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는 '도전적 문제' 출제자가 없습니다. 문제 풀이 역량은 이미 물 담긴 풍선처럼 부풀어져있지만 이것을 터트려줄 혁신자가 없습니다.”
이정동 청와대 경제과학특별보좌관은 '도적적 문제 출제자'가 많아질수록 잠재적 혁신동력이 축적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수요를 산업 곳곳에서 깨우면 혁신을 촉진시킬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 특보는 도전적 문제를 출제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으로 현업 전문가이자 신기술 노출 빈도가 많은 사람을 꼽았다. 그는 “각 산업분야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수십년간 현장에서 경험을 축적한 사람들”이라며 “이들에게 신기술과 관련된 평생학습 기회가 제공된다면 도전적 문제 출제자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중국의 인공지능(AI)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한 것도 산업 곳곳에서 문제 출제자 수요가 봇물처럼 터졌기 때문이라 진단했다.
이 특보는 우리 사회가 혁신성장을 견인하는 데 있어 '정치적 역량'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혁신은 정부가 하는 것이 아니다. 민간이 해야 한다”며 “필연적으로 혁신적 파괴로 인해 밀려나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는 사회적 합의의 문제로, 이는 정치 영역”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혁신을 위한 정치적 담론이 보다 활발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주문했다. 정치적 합의 과정에서의 시행착오가 하나씩 쌓이다보면 '혁신 체력'으로 축적된다는 것이다.
-청와대에 경제과학특보가 신설된 배경을 무엇이라고 보는가. 지난 5개월여 동안 느낀 산업계 진단이 궁금하다.
▲혁신이라는 것은 금방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 사회 이슈와 겹쳐져 있을 경우 항상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속성상 혁신은 중장기 이슈이기 때문에 그런 접근에서 목소리를 내려고 한다.
특보의 주된 역할은 혁신과 관련해 밖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를 안으로 가감없이 전달해 주는 것이다. 중요한 이슈는 한번 듣는다고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직위 상관없이 청와대 정책실 중심으로 의견을 전달하고 있다. 특보의 영문명도 '스페셜 어드바이저(Special Advisor)'다. 사회 혁신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중장기 이슈에 대해 일관되게 조언하고자 한다.
그간 다양한 산업계 사람을 만났다. 개인적으로 플래카드(현수막) 내걸고 하는 공식 행사를 싫어한다. 삼삼오오 만나 솔직한 이야기를 들었다. 경제지표는 겉으로 드러난 수치다. 내면의 체력이 훨씬 중요하다. 우리나라 산업계는 지난 20년 동안 잠재성장률이 계속 떨어지고 있다. 현장의 문제 의식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중장기적으로 근본적인 돌파구 마련이 필요해 보인다는데 공감대가 있었다.
-돌파구라면 새로운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인가, 아니면 기존 시스템·제도 개선을 주문할 것인가.
▲양쪽 모두다. 사실 제도는 지난 20년간의 문제다. 우리 산업이 가지고 있는 중장기 트렌드로 볼 때 '패러다임(루틴)'이 바뀔 때가 된 것 같다. 20년 전부터 조금씩 바뀌었어야 했다. IMF 시절 부정적인 측면이 있긴 했지만 산업 측면에서 '루틴'을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계기였다. 하지만 중국, 환율 등의 효과로 훅 지나갔다. 근본 체질은 개선되지 않고 덩치만 커졌다.
이제는 새로운 시도, 혁신적인 시도가 아니고서는 안 된다는 본질적인 믿음, 공감대를 가져야 한다. 바닷물이 들어왔다 나가는 것을 반복하면서 밀물이 몰려오듯 혁신도 그것을 밀어가는 저력을 가지고 있으면 앞으로 전진할 수 있다. 지금은 그러한 물결이 계속해서 왔다갔다 해야 한다.
-'타다' 서비스 등 신산업의 경우 기존 이해당사자들과 갈등이 첨예하다. 이해당사자간에 합의점을 이끌어낼 현실적 묘안이 있는가.
▲혁신은 정부가 하는 것이 아니다. 민간이 해야 한다. 필연적으로 혁신적 파괴로 인해 밀려나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는 사회적 합의의 문제이다. 이는 정치 영역이다. 합의의 준거를 정부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우리 정치 프레임이 이러한 진지한 논의를 담아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혁신을 위한 정치적 담론, 건강한 담론이 이뤄져야 한다. 혁신의 관점에서 보면 정치 실종 상태다. 앞으로 여러 문제가 더 많이 생겨날 것이다. 일괄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룰이 없다. 모든 것이 다 다르기 때문에 하나씩 케이스를 쌓아가야 한다.
네거티브의 요체는 규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케이스'를 쌓아가는 것이다. 고도의 사회적 합의 과정이다. 그런 과정에서 혁신지향적 정치가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정치적 합의 과정이 성숙될 필요가 있다. 케이스를 잘 쌓아서 점묘화처럼 혁신 그림을 그려 나가야 한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갈등 해소에 뒷짐을 진다거나 정부 역할 실종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 실종은 위험한 지적이다. 과거 개발경제시대처럼 정부가 결정해 주는 대로 따르겠다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똑같은 비즈니스라고 해도 사회적 맥락이 다르고, 미국에서 성공했다고 해도 우리나라에서 성공이 담보되지 않는다. 혁신과 관련된 정치적 담론 수준이 굉장히 높아져야 하는 이유다.
정부의 '규제 철폐'라는 표현은 굉장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자율주행의 경우 사고시 누가 책임을 질지 등이 정리되지 않고서는 불안감으로 사용할 수가 없다. 우리가 평소 옷을 입는 이유는 다 같이 살아가기 위해서다. 신기술은 반드시 새로운 제도를 동반한다. 지금의 규제 철폐라는 표현은 옷을 없애라는 말곽 같다. 기술 발전 속도에 맞춰 옷을 잘 수선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 청와대의 혁신 마인드는 어떠한가. 컨트롤타워 차원에서 개선점은 없는가.
▲굉장히 실용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 혁신은 컨트롤타워에만 맡겨둘 것이 아니라 범부처가 일관되고 집요하게 강조해야 한다. 최근 혁신금융이나 벤처육성 정책에서 스케일업 펀드 조성 등을 보면 주목할 만하다. 기존 투자 관행을 변화시키기 위한 숨은 노력이 보인다. 경력자(시니어) 창업도 중요한 포인트가 될 수 있다. 스케일업 펀드가 이 부분에 지원된다면 상당히 임팩트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 정부의 디테일한 변화 시도와 노력 하나하나가 중장기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낼 것으로 본다.
-경력자 창업 지원을 왜 중요한 변화로 볼 수 있는가.
▲미국 창업자만 보더라도 창업 평균 나이가 45세이다. 실리콘밸리 하이테크 기술 창업자를 보면 평균 50대다. 페이스북 등의 20대 창업 성공은 매우 특이한 상황이다. 40대 준비된 창업자는 관련 분야에서 깊은 인적 네트워크와 도메인 지식을 갖추고 있다. 이들의 창업은 고용 창출력도 높다. 지금의 AI, 빅데이터 등 기술 교육은 현업 전문가에게 제공돼야 한다. 무엇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게 해줘야 한다. 우리 사회에 솔루션을 제공하는 사람은 너무나 많다. 하지만 도전적 문제 출제자가 없다. 축적된 경험을 보유한 경력자에게 새로운 기술을 적극 노출시켜주면 혁신적 문제 출제자가 될 수 있다.
인텔이 메모리칩을 만들다가 비메모리칩으로 사업을 다각화했다. 일본의 전자계산기 업체인 비지콤에서 인텔에 성능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의뢰했던 것이 지금의 비메모리로 발전했다. 우리나라는 인텔 같은 회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비지콤 같은 문제 출제자가 부족하다.
정부가 추진하는 스마트 팩토리가 성과를 내려면 사장, 공장장을 비롯해 현장의 부장, 과장 등이 조금 다르게 해보자는 도전적 문제를 출제해줘야 한다. 중국에서 AI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게 된 것도 수천곳의 비지콤 같은 회사가 문제 해결을 요구하면서다. 사회 곳곳에서 문제 출제자들의 수요가 많아져야 한다.
-현 정부는 대기업 주도 성장의 한계를 지적한다.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지금까진 우리는 공급자 주도의 산업 혁신을 이뤄왔다. 우리가 했던 모델은 답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다. 경쟁자보다 한 단계 더 높은 목표를 쉽게 설정할 수 있었다. 그 목표에 맞춰 추격형 연구개발을 했고, 예측 가능한 글로벌 수요에 맞춰 빠른 속도로 추격했다.
지난 정부에서 '한국형 알파고'가 탄생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알파고를 두 눈으로 확인했고 조금 더 나은 것을 만들기 위한 연구개발에 투자하는 방식이었다. 결국 공급자 주도다. 이러한 방식도 괜찮지만 중국이라는 나라가 없을 때 이야기이다. 이제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대기업도 새로운 비즈니스 룰을 만들어 가야한다. 이를 위해선 '기술적 깊이'가 있어야 한다. 후지나 소니처럼 다소간의 부침이 있더라도 센서 기술 하나로 필름 생산에서부터 화장품, 자기저장장치, 재생의학 등 사업 영역을 다변화했다. 기술적 깊이가 있다 보니 산업 변화에도 대응이 된 것이다. 시행착오를 꾸준히 쌓아가며 깊이를 갖춘 것이다. 그렇다고 현 대기업의 상황을 막연히 부정적으로 볼 것은 아니다. 3만달러 시대를 이끈 저력을 가지고 있다. 축적된 역량을 바탕으로 새로운 기술을 통해 한번 더 업그레이드 할 필요가 있다. 뭐든 '제로 베이스'로 출발하는 것은 없다.
-내년 국가 연구개발(R&D) 예산 증가율이 1%대로 다시 곤두박질 칠 것으로 예상된다. 적정하다고 보는가.
▲R&D 투자는 더 해야 하지만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한다는 것은 생각을 다시 해봐야 한다. 예산 규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용을 봐야 한다. 유명 국제학술지에 게재되는 논문이 많음에도 실용화가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또 실용화 연구에 돈을 쏟는다. 도전적 수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연구과제에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
미국의 경우 R&D 예산의 절반이 국방 분야에 들어간다. 공공구매가 수요 촉진제 역할을 한 것이다. 전면적인 것이 아니라 그물망의 코만 들어 올린 것이다. 글로벌 기업도 R&D와 함께 '오픈 이노베이션'에 더 많이 관심을 두고 있다. 국가 R&D도 문제 풀이 보다는 문제 제출 쪽 지원으로 생각을 바꿔나가야 한다.
-미중 무역 분쟁이 심각하다. 총을 쏘지 않을뿐 사실상 무질서하게 싸운다.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결국 국제 분업 환경 속에 편입돼야 한다. 일본, 독일이 망하지 않는 이유가 미국 실리콘밸리의 물적 컴포넌트를 제공하는 기지로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같이 손을 잡은 것이다. 이들과 얽혀야 하고 그 속에서 우리의 고유성을 찾아야 한다. 단순한 공급기지 역할로만 남는다면 대만처럼 될 수 있다.
○이정동 경제과학특별보좌관은
문재인 대통령이 콕 집어 발탁한 인사다. 문 대통령은 야당 대표 시절 이 특보의 저서인 '축적의 시간'을, 집권 후에는 후속작인 '축적의 길'을 읽고 감명 받아 '스페셜 어드바이저'로 임명했다. 문 대통령은 올 초 청와대 직원에게 설 선물로 이 책을 나눠주기도 했다.
그간 역대 정권에서 'IT특보'라는 직책은 있었지만 '경제과학특보'는 전례가 없다. 문 대통령은 이 특보에게 혁신성장에 관한 기술 자문을 구하기 위해 직책을 신설했다.
이 특보는 기술혁신 전문가다. '혁신은 끊임없는 시행착오에서 축적된 고도의 경험지식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는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혁신성장의 주요 어젠다를 설정하고 청사진을 제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지난 3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캠퍼스에서 만난 이 특보는 “물결이 왔다 갔다 하면서 하나의 혁신이 자리 잡게 된다”며 “지속적으로 밀어가는 저력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대담=이호준 정치정책부장
정리=성현희 기자 sunghh@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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