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산 김원봉 선생에 대한 누리꾼들의 관심이 뜨겁다.
김원봉은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을 조직해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인물이다.
1898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그는 1919년 의열단을 조직했으며, 중국 황푸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대 후반 조선민족혁명당을 이끌고 중국내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했다.
1939년 5월에는 김구와 전국연합전선협회를 결성했고, 단일당 결성에 합의해 7당통일회가 열렸으나 결국 실패했다.
1941년 6월 조선민족혁명당은 제6회 전당대표대회에서 임시정부 참가를 결의했고 '조선의용대'도 광복군 제1지대로 합편됐으며, 1942년 광복군 부사령에 취임했다. 1944년 임시정부 제38차 회의에서 국무의원 및 군무부장에 올랐다.
해방 후 귀국했지만, 1948년 4월 남북협상 때 월북했다. 이후 북한 국가검열상과 노동상, 공산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을 거쳐 1957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위원장까지 올랐으나 해임된 후 숙청됐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의 독립 이후 행적을 둘러싸고 정치권에서의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올해 들어 1945년 8월 14일을 기준으로 독립유공자를 서훈하는 문제가 정무위원회에서 논의되고 있다고 전해지면서 논란은 더욱 커지고 있다.
보훈처 자문기구인 국민중심보훈혁신위원회는 지난 1월 "김원봉처럼 남북에서 온전히 평가받지 못하는 독립운동가를 유공자로 서훈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전자신문인터넷 윤민지 기자 (yunmi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