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의 대 한국 디스플레이와 반도체 제조용 핵심 소재 수출 규제 조치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과거 경험하지 못한 형태의 한-일 무역 갈등이 장기화 국면에 접어들 조짐을 보이고 있다. 우리 정부는 관련 산업계뿐만 아니라 연구계, 학계 등과 그동안 수입에 의존해 온 핵심 소재·부품의 수요·공급 방안 및 장기 대응책 마련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일각에서는 대기업의 책임을 지적한다. 우리나라 주력 산업에 필요한 핵심 소재·부품 대부분을 일본에 의존해 온 탓이라는 것이다.
초연결 사회로 나아가는 21세기 국제 산업 환경에서 모든 소재·부품의 국산화는 경제 여건상 불가능에 가깝다. 극한 경쟁이 빈번한 글로벌 시장에서 품질과 가격이 떨어져도 자국 제품을 고집하는 사례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다른 한편에선 정부의 기초과학 홀대의 결과라는 쓴소리도 나온다.
안타깝지만 국가 과학기술 육성이 장기 비전보다 정부 변화에 따라 너무 자주 바뀐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우리나라 과학기술 육성의 중추 역할을 담당하는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도 유망 분야에 대한 꾸준한 투자보다 단기 실적 위주로 운영된 측면이 없지 않다.
최근 정부 주도로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소속 출연연의 역할·책임(R&R)을 재정립하고 국가 과학기술의 백년대계를 세우고 있던 차에 이번 사태가 터지면서 만사지탄을 떠올리게 한다.
문제가 된 소재·부품을 다른 국가에서 수입하는 방안은 급한 불을 끄는 단기 효과일 뿐이다. 장기로는 외교 문제가 산업 분야에 영향을 미쳐 국가 위기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의 근본을 줄여 나가는 것이고, 이것이 우리 과학기술 연구계가 해야 할 임무다.
우리 정부는 원천 기술 개발과 산업기술 경쟁력 강화라는 양대 목표 아래 연구개발(R&D)에 투자해 왔다.
최근에는 R&D 투자 효율을 높이는 정책이 화두다.
원천 기술 산업화는 '기술의 죽음계곡'(테크니컬 데스밸리)을 넘어서기 위한 치밀한 계획이 필요하다.
주력 산업과 미래성장동력 산업이 요구하는 소재·부품 정보를 기초연구자와 공유하고 세세하게 제시해 기초, 응용, 상용화 단계에서 일하는 모든 연구자가 같은 목표를 향해 협력할 수 있는 연구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기존 현장에서 중소기업은 소재를 개발해도 대기업이 써 주지 않는다고 푸념하고, 대기업은 쓸 만한 소재를 국내에서 구입할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소재 분야 연구자는 개발한 소재 상용화에 필요한 다른 요건은 해당 기업이 해결할 문제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또 대기업은 기존 생산 시스템에 새로운 소재를 적용해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기꺼이 안으려 하지 않았다.
기술 선진국에 비해 R&D 역사가 짧고 수출 중심 경제 구조에서 더 빠른 성과 창출이 필요한 우리나라는 여러 시행착오와 실패 속에 나오는 핵심 소재 개발이 쉽지 않다.
축구 게임에서 골키퍼·미드필더·포워드로 역할과 책임을 구분하듯 연구 분야도 대학·연구소·기업이 기술 개발 단계에서 고유 임무를 효과 높게 수행해야 한다.
기술 단계별로 분산돼 있던 연구 목표의 초점을 다시 맞추고 대학·연구소·기업 연구자들이 소통·협력하면 세계 수준의 경쟁력을 갖춘 핵심 소재를 이른 시간 안에 국산화할 수 있다.
R&D는 보이지 않는 미지의 목표에 대한 투자이지만 높은 위험에 상응해서 높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경제 분야다. 우리나라와 같은 수출 중심 국가, 급변하는 경제 환경 속에서 유일한 생존 수단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핵심 부품·소재 R&D와 국산화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앞에서 얘기한 '기술의 죽음계곡'을 넘어설 다리가 필요하다.
출연연은 중소기업과 대기업을 잇고, 대학 기초 연구와 기업 상용화 연구를 이어 주는 플랫폼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전문 집단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래서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중장기 다리 역할을 맡아야 한다.
이정환 재료연구소장 ljh1239@kims.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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