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R&D 과제를 수행하다보면 힘들 때가 많습니다. 기업으로 치면 영업이익 없이 적자를 보면서 매출만 올리는 셈이죠. 계약 조건이 연구자에게 분명 불리합니다. 개선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기업, 연구계가 함께 바뀌지 않는 한 불합리한 관행이 계속될 수 밖에 없습니다.”
국내 한 대학 교수는 기업 R&D 과제 수행을 두고 이같이 말했다. 기업 R&D의 불공정 계약 조건에 대한 불만, 개선 필요성이 제기된지 여러해가 지났지만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고 성토했다.
연구계는 발주자인 기업과 수주하는 연구자 모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봤다. 현 풍토를 개선하기 위해선 지식재산권에 대한 정당한 대우와 가치를 인정하는 풍토를 정착시키고, 대학도 제살깎기식 수주를 자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불공정 R&D 계약 굳어질라
대학과 기업 사이 R&D 계약 조건이 연구자에게 현저하게 불리하다는 지적은 오래전부터 제기됐다. 2010년경 산업계와 대학연구자를 중심으로한 연구계가 불공정 계약 조건을 개선하자는 취지로 논의에 나섰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이후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연구를 통해 나오는 시제품, 보고서, 특허 등 성과물은 기업이 100% 소유하는 것이 일반적 계약이 됐다. 발명, 고안, 식물신품종, 산업디자인, 상표, 저작물, 저작인접물, 컴퓨터 소프트웨어는 물론 심지어 노하우까지 모든 지식재산권을 기업이 단독으로 차지한다. 연구와 직접 관련 없이 연구자가 스스로 얻은 지식재산권이라 할지라도 기업과의 합의를 거쳐야 연구자 권리를 인정받을수 있도록 계약 조건을 걸기도 한다. 연구비에 기존 대학 소유의 지식재산권 사용료를 포함시키거나 제3자의 영업비밀, 특허권, 저작권 등의 침해가 발생한 경우 손해배상에 대한 책임을 연구자에게 전가하는 것도 보통이다.
정부 R&D 계약 조건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정부 R&D 과제는 공동연구관리 규정에 따라 각 부처별로 연구과제 규정을 마련하고 표준 연구협약 계약서 양식에 따라 체결한다. 연구자가 R&D를 통해 개발한 기술, 지식재산권 등은 직무발명 규정에 따라 소속 기관이 소유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후 소속기관이 기술을 이전하거나 특허료 등으로 수익을 얻을 경우 연구자는 일정 부분 보상을 받는다.
기업 R&D 계약 조건상 설령 기업과 연구기관이 지식재산을 공동소유해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연구기관이 지분을 처분하거나 제3자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하려면 기업의 허가를 얻어야 하기 때문에 사실상 공동소유 효력을 내기 어렵다.
문제는 이런 계약 조건이 고착화됐다는데 있다. 기업 법무팀이 자사에 유리하도록 만든 하도급기업 계약서를 사실상 산학협력연구개발에 그대로 적용하면서 수정을 허락치 않는다.
한 대학 교수는 “기업 R&D 계약 조건 가운데 연구자에게 불리한 사례만 모아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기업 R&D 계약 조건이 이런 형태로 표준화되고 있다”면서 “기업은 철저하게 유리한 형태의 표준 계약서를 갖춰놓고 이후 연구자나 소속 대학의 산학협력단과 협상하며 조건을 다듬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설명했다.
◇기업-대학 '맞손', 연구생태계 혁신으로 나아가야
특정 분야에서 연구 성과가 입지전적인 유명 교수를 제외하면 사실상 대다수 교수가 기업과 R&D 계약을 체결할때 제 목소리를 내기 힘들다. 기업으로부터 오랜기간, 다수 R&D를 수주함으로써 사실상 종속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대학 연구자는 다소 불리하더라도 관계 유지를 위해 계약을 맺는다.
신진 연구자는 더욱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다. 자신의 실험실 연구자 인건비와 연구 실적 확보를 위해 불리한 조건에도 우선 R&D를 수주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대학 산학협력단 관계자는 “최근 해외에서 연구를 마치고 돌아온 신진 연구자에게 R&D를 제안하는 기업이 많은데, 계약 조건을 보면 연구자가 발명 권리를 갖지못하도록 명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신진 연구자는 초기 연구실적 확보를 위해 계약을 체결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유지되면 손해를 보는 것은 연구자다. 자신이 발명한 연구성과의 가치가 향후 급등해도 권리를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학, 연구계 내에서 양극화도 심화되고 있다. 서울 소재 한 대학교수는 “대학의 평판도에 따라 계약이 좌우되는데 연구성과가 많은 연구자와 그렇지 못한 연구자 사이에 산학협력 양극화도 뚜렷해지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1차적으로 대학 차원에서 산학협력단 내 지식재산 전문인력을 늘리는 등 연구결과물을 보호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대학 산단 소속 변리사는 “특허 등 지식재산의 가치는 당장 파악하기 어렵고 파급도 예상하기 힘들다”면서 “대학 연구자가 기술의 파급력을 감안한 계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구자가 계약 때마다 법무팀과 협의하는 것만으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풀 수 없다. 기업은 상생 관점에서 연구자 성과를 인정하고, 연구계 또한 당장 R&D 수주에 급급하기 보다는 미래를 내다보는 계약을 체결해야 한다.
한 연구자는 “연구자 지원 성격이 강한 미국 산학협력과 직적접으로 비교하긴 어렵지만 미국은 산학협력을 통해 나온 연구성과를 연구자 소속기관에 양도한다”면서 “우리 기업도 R&D를 '하청' 관점에서 볼 것이 아니라 기업 혁신을 위한 파트너로 인식하고 지원하는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연구자는 “연구자 또한 연구 성과에 대한 정당한 보상과 미래 가치를 인정받는 계약을 체결하면서 지금의 관행을 스스로 바꿔나가야 한다”고 주문했다.
최호 정책기자 snoop@etnews.com, 전지연기자 now21@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