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정시 확대를 골자로 하는 교육개혁 관계 장관회의를 주재한 지난 25일 오전. 같은 시간 OECD는 서울에서 제10차 OECD 2030 워킹그룹회의를 열고 교육과정-수업방식-학생평가를 어떻게 일관되게 할 수 있을 것인지 논의했다. OECD는 몇 년에 걸친 연구 끝에 지난해 '학습 나침반'이라는 개념을 개발하고 이번 회의에서는 이를 교육과정과 수업방식, 평가에 적용할 방법을 찾았다. 나침반은 학생들이 2030년 이후 미래를 살아갈 수 있도록 교사의 지도만을 따르는 것이 아닌 스스로 의미를 찾고 책임 있게 헤쳐 나갈 수 있도록 학습하는 것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이번 회의에서는 교수학습 평가도 숫자나 보고서 기반이 아니라 학생들의 협업을 어떻게 평가하고 문제 해결을 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졌다.
정작 회의 개최지인 한국에서는 주목받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첨예한 문제 중 하나인 '대입' 논쟁에 불이 붙어 미래 교육은 뒷전으로 밀린 탓이다. 선진국이 미래 역량을 위해 교육 혁신을 강조한 사이, 우리는 학령인구 감소 시대에 의미조차 퇴색해가는 대입 제도를 붙들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여론 쫓다 첨예한 대립만
문 대통령은 기존 교육 철학을 뒤집고 정시 확대를 주문한 이유에 대해 국민 기준과 잣대를 들었다. 문 대통령은 “(지금까지) 수능은 사교육비를 많이 지출할수록 좋은 성적 받아 좋은 대학 가고 부모세대 부를 대물림하는 구조라고 생각했다”면서도 “학생부 종합전형은 공정성 투명성을 믿지 못하니까 수험생이나 학부모들은 차라리 점수로 따지는 수능이 더 공정하다 생각을 하는거다. 그렇게 공정에 대한 잣대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민 기준, 잣대 그런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 아닌가”하고 덧붙였다.
대통령 설명은 첨예한 갈등만 부추겼다. 한국교총·전교조 등 교육 관련 단체는 물론 시민단체들의 성명이 쏟아졌다.
한국교총은 “정치적 요구와 예단에 떠밀려 11월 중에 섣불리 결정하고 발표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교육에 대한 정치의 개입이며 교육현장에 혼란만 초래할 수 있다”고 꼬집었다. 대입제도는 국가 교육의 큰 방향이자 학교교육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안인 만큼 수시·정시 비율 등 지엽적 문제만 떼서 논의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전교조는 “정시 확대 결정은 우리 교육의 퇴행이며 공교육 포기선언”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문재인 정부의 교육 철학이 있기는 한지,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오랜 논의 끝에 사회적 합의에 이른 과정은 모두 무위로 돌아가도 되는지 반문했다.
혼란은 불가피하다. 유은혜 부총리는 취임사에서부터 줄곧 “2022학년도 대입 개편안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으나 하루아침에 이를 뒤집었다. 4년 예고제라는 제도까지 스스로 무시한 꼴이 됐다. 학종 비중이 높은 서울 소재 몇 개 대학에 한정된다고 했지만 대책을 발표할 11월까지 학생과 학부모는 온갖 억측 속에 대입과 고입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다. 교육 당국에 대한 신뢰마저 땅에 떨어졌다.
◇대입만 나오면 미래교육 논의 올스톱
그동안 문재인 정부는 고교학점제를 논의하면서도 애써 고교학점제 도입에 따른 대입 전환을 외면했다. 2025학년도에 고교학점제가 전면 도입된다면 2028학년 입시 개편은 당연한 수순이다. 8년 후의 문제임에도 '대입' 자체를 거론하는 것을 금기시했다. 장기간 토론과 사회적 합의를 통해 입시를 안정적으로 개편할 기회임에도 이를 무시했다. 당시 '입시'가 금기가 된 배경에 대해 교육부 공무원들은 청와대에서 혼란과 여론 악화를 우려해 대입 논의를 하지 말 것을 지시한 것이라고 털어놨다.
이번 대입 논쟁으로 인해 미래 교육 논의는 자취를 감췄다. 한-OECD 국제교육 콘퍼런스에서 국가교육회의는 지난 2월부터 준비해 마련한 2030 교육체제 개편안을 소개하려했으나 설명조차 하지 못했다. 논란을 의식해서였다.
이 같은 일은 한두 번이 아니다. 올 초 교육부가 개최한 고교학점제 교원연수 워크숍에서 입시 분야 권위자인 김경범 서울대 교수는 고교학점제 이후 수·정시를 통합해 운영하는 안에 대한 보고서를 냈다. 뒤늦게 인쇄본을 확인한 교육부는 이와 관련한 보도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한 학자의 대안 제시일 뿐임에도 교육부 행사에서 대입안을 거론하는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했다. 아니나 다를까 행사 후 한 시민단체는 김경범 교수의 안에 대해 규탄하는 시위를 하기도 했다.
교육당국은 고교 학점제는 학생들의 다양한 경로를 개발하고 진로를 탐색할 수 있는 제도라고 강조하면서도 이러한 체제하에 대입제도가 어떻게 바뀔지에 대한 논의 자체는 막고 있다. 학생들의 다양한 경로를 찾고 자발성을 키우기 위해 교육과정부터 평가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제도를 개편할 것인지 논의 자체를 할 수 없는 셈이다.
정부는 국가교육위원회라는 초당적 기구를 통해 이를 해결하려고 했으나 이 역시 논의가 중단된 지 오래다. 국가교육위원회는 10년 단위 중장기 국가교육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교육 정책에 대한 국민 의견을 수렴하는 기구다. 대입제도처럼 이해관계가 첨예한 사안을 두고 오랜 기간 동안 논의를 거쳐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낼 역할도 맡았다. 연초에는 설립이 속도를 냈다. 국가교육위원회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안(국가교육위원회법)은 지난 3월 조승래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45명이 공동발의했다. 여야갈등으로 국회에서 계류 중이다. 당초 목표였던 상반기 법안 통과는커녕 연내 통과도 불투명하다.
유 부총리가 취임 시 의지를 보였던 미래교육위원회도 주목 받지 못하고 있다. 당초 미래교육위원회는 다양한 진로 개발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해 미래 교육의 비전과 모습을 그려낼 계획이었다. 현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인의 경력을 공유하는데 그치고 있다.
◇해외에서조차 우려 목소리
전교조는 기자회견을 하면서 최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합(UN) 아동권리위원회에 참여한 한 위원의 지적을 언급했다. “한국 공교육제도의 최종 목표는 오직 명문대 입학인 것으로 보인다”면서 한국의 경쟁적 교육제도의 현실을 한 문장으로 꼬집었다는 것이다.
안드레아스 슐라이허 OECD 교육국장은 “한국에서는 학부모, 학생, 교사가 모두 대학입시에만 매몰돼 있다”면서 “한국처럼 부모 학생 모두가 입시에 지나치게 관심을 쏟는 국가는 찾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그는 “다른 많은 국가에서는 다양한 성공 경로를 모색하고 있고 대학은 그런 경로 중 하나에 불과하다”며 “한국은 대학에서는 전체적 시각에서 교육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 같고 좀 더 광범위한 경로로 확대되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문보경기자 okmun@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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