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해방 운동은 무엇일까? 민족 해방? 계급 해방? 성 해방? 작가 멕켄지 워크는 수많은 해방 운동 중에 유일하게, 또한 무한에 가깝게 성공한 것은 다름 아닌 탄소 해방이라고 표현했다. 인류세 주요 주제는 바로 탄소해방전선이라고. 뼈 있는 유머다. 해방된 탄소들은 온실효과를 촉발해 지구 기온을 상승시키고 전지구에 영향력을 펼치며 인류세를 이끌고 있으니.
지구생태계 위험은 국경도 계급도 초월한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체르노빌 원전사고를 계기로 펴낸 저서 '위험사회'에서 현대사회를 위험사회로 규정했다. 그는 위험의 특징을 전세계적이고 동시적이며 민주적이라 꼽았다. 여기서 민주성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좋은 의미가 아니라, 사회 계층의 구분 없이 모든 구성원이 공평하게 위험에 노출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지역주민만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당시에 실시간 중계 뉴스를 바라보던 전세계인과 향후 태어날 모든 인류에게까지도 원전 방사성 물질로 오염된 바다는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것이 바로 전세계적, 동시적, 민주적인 위험사회다.
한편 현대사회는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유지되는 문명사회이기도 하다. 컴퓨터나 인터넷은 물과 공기처럼 기본 생활필수품이 된 지 오래고, 핸드폰 없이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우리는 이미 기술과 밀접하게 결합돼 있다. 과학은 근대시대 귀족들이 실험대 위에 벌여놓던 고상한 학술활동이 아니라, 이미 일반시민의 일상생활 곳곳에 스며있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출연한 영화를 찾아 보여주는 인공지능(AI) TV, 약속장소까지 안내하는 지피에스(GPS), 부르면 대답하는 핸드폰 속 비서, 예약시간 맞춰 찰진 밥 완성했다며 낭랑한 목소리로 새벽잠을 깨우는 전기밥솥, 그리고 세제나 염모제 같은 생활 속 화학용품들까지도.
과학기술 발전 속도는 법률 제정보다 빠르고, 하루에 새롭게 합성되는 화학물질 숫자는 셀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다. 개발 당시에는 안전하고 효과적인 농약으로 알려진 염소계살충제 'DDT'처럼 뒤늦게서야 심각한 유해성이 알려지기도 하고, 상업적 목적을 앞세워 판매에 우선하느라 효과나 안전성 검증이 뒤처지기도 하며, 방사성 광물 모나자이트가 함유됐던 소위 라돈 침대처럼 짐작조차 못했기 때문에 검사항목에조차 들어 있지 않은 경우도 있다. 엄중한 절차와 정밀한 측정만으로는 최대의 이윤을 남기려는 자본의 기본속성까지 모두 제어하기는 어려운 현실이다.
이토록 쉴 새 없이 변화하는 위험사회에서는 시민들도 새로운 과학기술을 알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평생학습은 위험사회를 살아가는 지구인의 숙명이요, 지구라는 평생학교에서 중요도가 높아지는 필수과목은 아무래도 과학기술과 지구생태계일지 모른다. 위험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이라면, 미디어에서 제공하는 정보과 유명인의 광고만 수동적으로 따르는 대신, 의문을 가지고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하리라. 가구나 식품에서 방사능이 검출된다는데 그게 대체 무엇이고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지, 알루미늄이 치매를 유발한다는데 야식용 양은 냄비를 무엇으로 바꿔야 할지, 바디버든이란 무엇이며 유해 화학 물질 노출을 어떻게 최소화할지, 본래 조명용으로 개발된 LED가 어떤 원리로 피부 미용 효과가 있다는 건지, 내가 바른 썬크림의 나노입자가 바다 생태계에는 어떤 영향을 줄지, 혹시 지금 내가 사용하는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알려준 정보는 예전에 내가 '좋아요'를 클릭했던 이력을 토대로 알고리즘이 선택해서 제공하는 편파적 정보는 아닌지를 말이다. 과학기술은 위험사회인 현대 지구생태계를 살아가는 시민의 교양, 어쩌면 교양을 넘어선 상식과 생존 필수 지식이므로!
이승미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양자기술연구소 책임연구원 seungmi.lee@kriss.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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