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경 명예회장은 기업의 외형적 성장뿐만 아니라 선진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한 과감한 경영 혁신을 시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민간 기업 최초 기업 공개, 고객가치 경영 도입, 대기업 최초 '무고(無故) 승계', 구씨와 허씨 양가 동업의 아름다운 정리 등이 대표적이다. 그는 기업 경영에 필요한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과감하게 실천에 옮긴 재계의 혁신가였다.
구 명예회장은 회장직에서 내려오며 남긴 이임사에서도 “혁신은 영원한 진행형의 과제이며 내 평생의 숙원”이라고 강조했다.
◇민간기업 최초 락희화학 기업공개…투명경영 선도
구 명예회장은 1970년대에 잇따른 기업공개로 우리나라 초기 자본시장에 활력을 불어 넣고, 민간 기업의 투명경영을 선도했다.
당시만 해도 기업공개를 기업을 팔아 넘기는 것으로 오해해 우려하는 분위기였고, 일부 임원들은 기업공개를 강력히 반대했다. 국내 민간 기업에서는 이제까지 기업공개를 한 사례가 없었다. 그럼에도 구 명예회장은 기업공개가 앞으로 거스를 수 없는 큰 흐름이 될 것이며, 선진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 필수적이라는 믿음을 꺾지 않았다.
1970년 2월 그룹 모체인 락희화학이 민간기업으로는 국내 최초로 기업공개를 통해 증권거래소에 상장했고, 곧 이어 전자 업계 최초로 금성사가 기업공개를 하며 주력 기업을 모두 공개한 한국 최초 그룹이 됐다. 이후 금성통신(1974), 반도상사·금성전기(1976), 금성계전(1978), 럭키콘티넨탈카본(1979) 등 10년간 10개 계열사의 기업공개를 단행해 안정적인 자금 조달을 통한 도약 기반을 마련했다.
또 구 명예회장은 다른 기업보다 한 발 앞서 우리나라 기업의 활동 지평을 세계로 확장시켜, 재임하는 동안에만 50여 개의 해외법인을 설립했다. 특히 1982년 미국 알라바마주 헌츠빌에 컬러TV 생산공장을 세웠다. 이 공장은 국내 기업 최초로 설립한 해외 생산기지였다.
◇모범적인 합작경영 이끌어
구 명예회장은 해외 투자에 그치지 않고 독일 지멘스, 일본 히타치·후지전기·알프스전기, 미국 AT&T 등 세계 유수 기업들과 전략적 제휴를 통한 합작 경영을 펼쳤다. 이를 통해 빠른 속도로 선진 기술과 경영 시스템을 습득할 수 있었고, LG는 세계로 활동 무대를 확장했다.
대표적인 합작는 1966년부터 시작된 호남정유와 미국 칼텍스와의 합작이다. 50대 50의 대등한 비율로 경영을 양분했음에도 상생과 조화라는 기본을 존중하고, 원칙을 지키면서 잡음 없이 합작경영을 이어왔다.
1974년에는 금성통신이 외국과 합작기업으로는 국내 최초로 기업공개를 했을 당시, 합작 파트너였던 지멘스 측의 협조가 원활해 언론에서 합작사업 모범 사례로 집중 조명했다.
지멘스와의 합작은 선진기술을 배우는 좋은 계기가 됐다. 지멘스 기술자가 금성통신에 1년 이상 머물며 금형기술을 전수해줬고, 또 가전부문에서도 라디오나 냉장고 부품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을 줬다.
럭키그룹이 합작 사업의 좋은 선례를 남기면서 당시 한국에서 사업을 하려고 하는 많은 외국기업들이 여러 경로를 통해서 럭키그룹에 사전 자문을 구하러 오기도 했다.
◇전문경영인 중심 '자율과 책임경영' 도입…고객중심 경영이념
구 명예회장은 개방과 변혁이 소용돌이치는 1980년대를 겪으면서 국경 없는 국제 경쟁을 예견하고 깊은 위기감을 느꼈다. 그는 스스로 경영혁신 방향 수립을 진두지휘 해 1988년 21세기 세계 초우량기업으로 도약을 목표로 한 '21세기를 향한 경영구상'이라는 변혁방향을 발표했다.
사업전략부터 조직구조, 경영스타일, 기업문화에 이르기까지 그룹의 전면적인 경영혁신을 담았다. 특히 회장 1인의 의사결정에 의존하는 관행화 된 경영체제를 벗어 던지고 선진화된 경영 체제를 정착시키기 위해 '자율과 책임경영'을 원칙으로 내세웠다.
구 명예회장이 주창한 '자율과 책임경영'은 고객과 사업을 잘 아는 전문경영인이 권한을 갖고, 자율적으로 사업을 수행하는 것이다. 대신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지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전문경영인 체제가 보편적이지만, 당시로서는 LG 내부는 물론이고 재계에서도 선뜻 실행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경영체제였다.
1990년에는 '고객가치 경영'을 기업 활동 핵심으로 삼은 새로운 경영이념으로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 '인간존중의 경영'을 선포했다.
구 명예회장은 이런 경영혁신 활동이 선언적으로 그치지 않도록 직접 '혁신 전도사' 역할을 자처했다. 일일이 임직원을 만나 경영혁신 필요성을 설득하고 이해시키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대기업 첫 무고 승계 단행
구 명예회장은 국내 대기업 사상 첫 '무고(無故) 승계'를 단행하고, 구씨와 허씨의 동업도 잡음없이 마무리했다.
구 명예회장은 1995년 2월, LG와 고락을 함께 한 지 45년, 회장으로서 25년 세월을 뒤로 하고 스스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국내 최초 대기업 '무고 승계'로, 당시 재계에 파장을 일으켰다.
아직 은퇴를 거론할 나이가 아닌 시기에 그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은 경영혁신 일환으로 경영진의 세대교체가 필요하다고 결심한 데 따른 것이었다.
구 명예회장은 퇴임에 앞서 사장단에게 “그간 혁신을 성공시킬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 노력을 충실히 해 왔고 그것으로 나의 소임을 다했으며, 이제부터는 젊은 세대가 그룹을 맡아서 이끌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며 퇴임 의사를 표명했다.
구 명예회장이 회장에서 물러날 때 창업 때부터 그룹 발전에 공헌을 해 온 허준구 LG전선 회장, 구태회 고문, 구평회 LG상사 회장, 허신구 LG석유화학 회장, 구두회 호남정유에너지 회장 등 창업세대 원로 회장단도 '동반퇴진'했다.
구 명예회장에게 은퇴는 그가 추진해 온 경영혁신 일환이었고, 본인 스스로 할 수 있는 마지막 혁신 활동이었다.
구 명예회장 퇴임 후 2000년대 들어 3대 57년간 이어온 구·허 양가의 동업도 '아름다운 이별'로 마무리했다. 57년간 사소한 불협화음 하나 없이 일궈온 구씨, 허씨 양가의 동업관계는 재계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양가는 기업의 57년 관계를 아름답게 매듭짓는 LG와 GS그룹의 계열분리 과정 또한 합리적이고 순조롭게 진행했다.
권건호기자 wingh1@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