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국내 반도체업계를 뒤흔든 키워드는 '국산화'였다. 7월 일본의 대 한국 수출 규제 조치 이후 대체재를 구하기 어려운 국내 반도체 산업의 생태계가 재조명됐다. 소재 다변화 기반은 국내 기술이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다. 타격받은 불화수소, 포토레지스트 외에도 소재·부품·장비(소부장) 분야에서 국산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국내 반도체 산업의 지속 가능한 성장과 초격차 유지를 위해 이 같은 분위기를 이어 가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국내 반도체업계는 지난 7월 일본의 수출 규제로 직격탄을 맞았다. 공정에 반드시 필요한 불화수소와 극자외선(EUV) 포토레지스트의 대 한국 수출이 포괄 허가에서 개별 허가로 바뀌면서였다.
반도체 공정에 필요한 초고순도 불화수소 생산은 일본 스텔라케미파, 모리타케미칼, 쇼와덴코 등이 과반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 EUV 포토레지스트는 일본 JSR, 신에쓰, TOK 등이 90% 이상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다.
수출 규제 직후 이들을 당장 대체할 수 있는 국내 제품이 없어 업계는 혼란에 빠졌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일본 현지 출장을 떠났고, 이석희 SK하이닉스 사장도 출국길에 올랐다.
그러나 초기 우려와 달리 하반기에 업계에서는 소재 수급 위기를 잘 버텨냈다는 평가가 나왔다.
특히 불화수소는 상당한 속도로 국산화가 진행됐다. 대기업과 중견 소재 업체의 협력, 정부의 발 빠른 승인 등으로 위기를 극복해 나가고 있다. 솔브레인의 새로운 불화수소 공장이 그 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부족분을 충분히 대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는 EUV 포토레지스트를 벨기에 우회 경로를 통해 수입하고 있다. 이곳에는 일본 JSR와 벨기에 반도체 연구개발(R&D) 허브 아이멕(IMEC)의 합작법인이 있다.
현재 EUV 포토레지스트를 생산할 수 있는 국내 업체는 전무하다. 그러나 일본 업체의 국내 생산 플랜트 설립 검토, 미국 업체와의 샘플 거래 등 국내에서 새로운 공급망 판도가 짜여지는 움직임이 파악된다.
일본의 수출 규제에 대응해 나가면서 소부장 국산화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졌다. 대표적인 예가 반도체 테스트베드 구축이다.
국내 소재 기술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글로벌 업체와 협력할 만한 수준에조차 미치지 못한 점을 고려, 중소 업체가 자율적으로 R&D 할 수 있는 기초 인프라를 조성하자는 목소리가 높다.
실제로 대전 나노종합기술원은 예산 450억원을 투입해 300평 규모의 테스트베드를 꾸미고 있다. 불화아르곤(ArF) 포토레지스트, 각종 가스 소재 개발에 활용될 예정이다. 그동안 노후 장비 일색이던 국내 테스트베드 설비가 변화할 움직임을 보이자 업계에서는 크게 환영하는 분위기다.
소재 외에도 핵심 장비 분야에서도 국산화가 탄력을 받고 있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의 두 번째 공장에서 쓰일 콘택트 공정용 식각 장비를 자회사 세메스와 개발하고 있다. 콘택트 공정은 반도체 회로를 깎는 식각 공정 가운데서도 고난도 공정으로 꼽힌다.
정부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새해에도 소부장 국산화 분위기를 이어 가기 위해 힘을 보탠다는 방침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소부장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새해에 1조2780억원의 예산을 투입한다고 밝혔다. 올해 예산 6699억원보다 2배 가까이 오른 규모이다.
정부 측은 30일 “핵심 소재·부품의 신속한 자립화를 위해 관련 사업 착수 절차를 줄이는 등 사업을 빠르게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이번 일본의 수출 규제 이후 국산화 움직임이 꾸준하게 진행돼야 한다고 진단했다. 한 업계 전문가는 “현재 대책은 일본과의 관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게 아니라 국내 산업 구조를 탄탄히 하고자 하는 취지”라면서 “현재 움직임이 지속되지 않으면 올해와 같은 상황은 반복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강해령기자 k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