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기고]슬프지만 우리 편은 없다

[전문가 기고]슬프지만 우리 편은 없다

2019년 7월 이웃나라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는 앞만 보고 달려가던 대한민국에 커다란 숙제를 던졌다. 역사 문제가 정치 문제로, 또다시 통상과 산업 문제로 일파만파 번지면서 산업안보의 해법을 찾기 위한 수많은 회의를 통해 대책이 마련됐다. 주력 신산업의 경쟁력 유지를 위해 대외 의존도, 특히 대일 의존도가 높은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정책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는 별개로 지난해 4월에 예비타당성조사(예타)를 통과해 산업통상자원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공동 추진하는 차세대 지능형반도체 연구개발(R&D) 사업은 지난 3년 동안의 노력을 통해 마련된 미래 반도체 산업의 육성정책이다. 일본이 수출 규제 품목으로 반도체 핵심 소재를 적시한 것도, 우리가 차세대 지능형반도체와 핵심 소부장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정책을 마련한 것도 반도체 산업은 이제 더 이상 독립된 주력 산업에 그치지 않고 모든 산업을 유지하는 가장 근본이 되는 기술 요소가 됐기 때문이다. 자동차, 항공, 통신, 가전 등 모든 산업은 반도체 기술과의 융합 없이는 경쟁력을 갖출 수 없어 도태될 것이기 때문이다. 차세대 지능형반도체 R&D 사업이 조기에 착수되기를 바란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세계 반도체 소자 시장을 쥐락펴락하던 기업의 절반 이상이 일본 기업이었지만 미국과 경제 마찰을 겪으면서 이제는 조연으로 추락한 상황이다. 세계 최초로 플래시 메모리 제품을 내놓은 도시바마저도 그 오래된 이름을 버리고 키옥시아라는 이름으로 개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보면서 일본 기업 사례로부터 교훈을 하나 얻어 보고자 한다.

반도체 소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십 가지 핵심 공정을 수없이 반복해서 우리가 원하는 작은 구조물을 3차원 형태로 제작해야 한다. 여러 가지 핵심 공정 가운데 노광공정이란 것은 빛을 이용해 회로설계 도면을 복사해 내는 기술로, 이 공정이야 말로 반도체 공정의 핵심 중 핵심이라 할 수 있다. 1990년대까지 노광장비는 일본의 캐논과 니콘이 세계 시장을 모두 차지하고 있었고, 그들을 견제할 수 있는 대안이 없었다.

1980년대 필립스 연구소에서 분사한 ASML은 1992년 IBM에 첫 장비를 팔 수 있게 됐지만 당시에는 캐논 등의 경쟁자로서는 너무나 미약한 존재였다. 그러나 ASML은 노광기술이 한계에 이르러 혁신 기술이 필요하던 2000년대 말에는 액침 ArF 노광장비 시장의 약 90%, 최근 열리게 된 EUV 노광장비 시장에서는 100%를 점유했다.

장비 한 대에 2000억원 가까이 하는 이러한 최첨단 장비 분야에서 후발 주자인 ASML이 우뚝 설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내가 잘할 수 있는 것과 남이 더 잘할 수 있는 것을 명확히 판단해서 협력 기업과 동반 성장하는 전략에 있었다고 본다. 모든 기술을 내재화하던 일본의 두 기업은 기술 난도가 높아지면서 개발 능력이 뒤처질 수밖에 없게 된 것에 반해 전문 기업을 통한 오픈 이노베이션을 꾀한 ASML은 아무도 따라올 수 없는 수준의 기술을 확보한 것이다.

사실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의 승승장구를 응원하는 나라는 그 어디에도 없다. 메모리, 시스템반도체, 파운드리 등 모든 반도체 산업 분야에서 한국, 일본, 미국, 대만, 유럽의 경쟁자 사이에 가장 껄끄러운 상대를 꼽으라 한다면 그것은 바로 한국이다. 메모리반도체 세계 1등을 넘어 반도체 전체 1등의 야심을 품을 수 있는 유일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경쟁 국가와 적절한 협력 관계를 유지함과 동시에 우리가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기술 개발에 전력을 모을 때다. 국민을 분열에 빠뜨리고 있는 정치와 달리 기술은 합심된 노력을 통해 우리 국민을 잘살게 해 줄 수 있다는 기대를 버리지 말았으면 한다.

안진호 한양대 신소재공학부 교수 jhahn@ha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