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학에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fallacy of hasty generalization)'라는 개념이 있다. 가끔 논쟁이나 토론에서 폼 나게 쓰는 친숙한 용어다. 백과사전에서는 '가설을 설정하는 중간 단계를 거치지 않고 성급하게 제한된 증거로 어떤 결론을 도출하는 오류'라고 정의한다. 쉽게 말해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식으로 부분을 전체로 착각해 저지르는 행위다. 비합리적으로 특정한 편견을 눈감아버리는 경향을 일컫는다.
뜬금없이 논리학 용어를 꺼내든 이유는 '에너지저장장치(ESS)' 화재 때문이다. 정부는 이달 6일 지난해에 이어 2차 조사결과를 공개했다. 학수고대했던 결과지만 발표 직후 산업계는 즉각 반발했다. 정부가 머쓱할 정도였다. 일주일이 지났건만 당사자인 삼성SDI·LG화학 등은 오히려 비판 수위를 높이고 있다. 정부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 지는 기업 입장을 감안하면 지나치게 유별난 반응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결국 조사 결과를 놓고 벌이는 공방이다. 여러 주장이 오가지만 섣부른 결론은 금물이다. 우선 발표내용이 상당히 전문적이다. 해당 분야 지식과 경험이 없다면 정확하게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양극파편, 리튬 석출물, 융용 흔적, 음극판과 분리막, 충전상한전압, 방전하한전압 등 등장하는 용어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 결과 내용을 단순화할 수 있지만 그렇게 만만한 사안이 아니다. 전문가들이 수개월 동안 조사한 내용을 문구 몇 개만 훑어보고 시시비비를 결정한다는 것도 난센스다.
그래도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야 한다. 바로 정부 역할이다. 정부 체면이 구겨질 데로 구겨졌다. 신뢰가 생명인 정부가 동네북 신세로 전락했다. 심판 역할을 기대했던 정부를 대하는 믿음이 사라졌다. 무엇보다 정부가 자초한 면이 크다는 점이 큰 아쉬움이다. 조사 결과 내용은 둘째 문제다. 1, 2차에 걸쳐 1년 가까인 진행한 화재조사였지만 결국 용두사미로 끝날 가능성이 높아졌다.
가장 큰 실망 배경은 일관성의 결여다. 1, 2차 조사결과가 판이하게 달라졌다. 2017년부터 2019년까지 23건의 원인을 분석한 1차 당시에는 부실한 설치와 운영 관리를 이유로 꼽았다. 2019년 8월 이후 5건을 조사한 2차에는 배터리를 지목했다. 배터리 불량이 화재 원인이라는 것이다. 원인에 따라 책임은 달라진다. 설치가 문제라면 시공업체로, 운영관리가 부실했다면 발주업체로, 배터리가 결함이라면 제조업체로 책임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 정부 발표를 기다린 데는 사실 관계를 통해 분명한 책임 소재를 가릴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정작 정부는 이쪽저쪽 변죽만 울리는 꼴이 돼 버렸다.
또 하나는 조사 목적의 불분명성이다. 법정 다툼 보다는 정부 발표를 기다린 배경은 사고 원인 규명과 재발 방지다. 불행히 어느 쪽도 성공하지 못했다. 원인 자체가 불분명하니 대책도 미지근하게 끝이 났다. 기껏해야 그동안 논의됐던 충전율 제한, 시설개선, 안전인증 수준에서 마무리됐다. 조사시작부터 결과, 대책까지 '일반화의 오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차라리 화재가 발생하지 않는 외국사례를 조사했다면, 아니면 아예 정부가 관여하지 않았다면 산업계 스스로 해결책을 찾았을 지도 모른다. 조사 결과는 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걱정이 태산이다. 다시 ESS화재가 발생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직하다. 화재가 발생한 2017년부터 4년 동안 국내 ESS시장은 한겨울이었다. 세계시장은 고속성장을 거듭했다. 세계무대에서 국내업체는 1, 2위를 달리고 있다. 'ESS화재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취재 총괄 부국장 bjk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