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등 이상의 사람들이나 한문을 웬만큼 안다는 사람들은 거의 다 썩고 나쁜 물이 들어 더 이상 그들에게 바랄 것이 없으며(중략) 아래서부터 변화해 썩은 데서 싹이 나고 죽음에서 살아나기를 원하고 원하노라.” 이승만이 한성감옥에서 집필한 '독립정신'은 조선 백성을 깨우치기 위한 국민계몽서다. 이승만의 통찰과 혜안이 담겼다.
1899년 고종 폐위 음모에 연루돼 옥살이를 시작한 이승만 나이는 24세였다. 국사범은 중죄인이었다. 목에 칼이 든 형틀이 걸렸다. 두 발은 족쇄에, 손은 수갑에 묶인 채였다. 형틀 무게는 육신은 물론 영혼까지 짓눌렀다. 살아있는 게 형벌이었다. 빨리 죽어 고통에서 해방되길 바랐다. 조국과 민족을 생각할 처지가 아니었다. 종신형을 선고받은 이승만은 러일 전쟁이 일어나면서 특사로 풀려났다. 5년 7개월의 옥살이였다.
1904년 2월 19일에 시작해 6월 29일 완성된 '독립정신'은 탈고 후 밖으로 몰래 빼내 보관됐다. 1905년, 먼저 출옥한 박용만이 여행가방 밑바닥에 숨겨 미국으로 가져갔다. 1910년 1월 로스앤젤리스에서 출간되었다. '독립정신'은 일제 조선총독부에 압수돼 강점기 내내 금서로 지정됐다.
이승만은 분별을 강조했다. “모든 정치제도는 언제나 그 나라 백성의 수준에 달려 있는 줄을 먼저 알아야 한다.” 제도개혁이나 헌법 채택은 백성의 깨우침 없이 의미가 없었다. “아무 양반의 말이라 하면 생각해 보지 않고 의례히 옳다고 하며, 어떤 상놈의 의견이면 아무리 좋아도 안 될 것이라 하여 듣기도 싫어하는데 어찌 생각을 해야겠는가!” 신분계급의 굴레에 갇혀 스스로 사고하지 않는 태도를 꾸짖었다.
조선에서 정치, 사회는 하나의 체계였다. 사회구성 계층은 양반이었으며 양반은 상민, 노비의 삶과 의식세계를 착취했다. 사대부가 권력을 독점한 조선 사회에서 상민과 노비들이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은 낯선 의식이었다. 깨우친다는 것은, 체계를 위협하는 불경한 짓이었다.
“경쟁이란 남과 비교해 한 걸음이라도 앞서가려고 하는, 먼저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지금 세상은 천하만국이 더욱 진보해간다. 배운 것을 개량해 서로 지혜와 재주를 가지고 다투어 나아가고 있다.” 이승만은 문호개방과 자유경쟁을 통한 통상을 강조했다. 자주독립의 출발은 문명개화였다.
이승만은 미국 독립선언서에 나타난 자유민주주의와 기독교정신을 닮고자 했다. 미국 독립선언서 핵심이념은 '생명, 자유, 행복추구, 기독교 정신'이다. 이승만은 문명과 종교의 상관성을 믿었다. 그에게 종교는 도덕의 기준점이었다. 도덕은 공동체의 규범이며 공동체의 구심점은 종교였다. 이승만은, 기독교 정신이 미국 자유민주주의와 서양문명의 본질임을 꿰뚫었다. 프랑스 정치학자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내린 미국 민주주의 성찰과 궤를 같이한다. “자유는 도덕성 없이 세워질 수 없고 도덕성은 신앙 없이 세워질 수 없다.”
부국강병(富國强兵) 모델은 미국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을 한반도에 대해 영토 야심이 없는 강대국이라 생각했다. 약소국 대한제국이 손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나라였다. 미국은 다양성을 하나의 문명으로 통합해 발전하는 세계화 중심의 문명국이었다. 이승만은 '모든 사람은 동등하게 태어났으며 생명과 자유와 행복은 남이 빼앗을 수 없는 권리'라는 미국 독립선언문의 가치를 '독립정신'에 담았다.
미국 독립선언서는 제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이 작성했다. 미국 2달러 지폐에는 제퍼슨 초상이 그려져 있다. 미국인들은 그것을 '행운의 지폐'라 부른다.
박선경 남서울대 겸임교수 ssonno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