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투자촉진법 제정으로 국내 벤처투자시장이 새로운 도약 계기를 맞게 됐다. 벤처투자와 관련한 내용이 개별법에 규정되면서 벤처투자가 창업자와 벤처기업, 중소기업의 투자 활성화를 지원하는 하나의 산업으로 독립하게 됐다.
국내 벤처투자산업은 꾸준한 성장세를 이어오고 있다. 벤처펀드 운용자산(AUM) 규모가 1조원을 넘는 벤처캐피털(VC)도 속속 등장하며 대형화를 추구하는 단계다. 유한회사형 벤처캐피털(LLC)과 특화 VC 등도 벤처투자산업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벤처투자 AUM 1조클럽 달성 VC 속출 기대
25일 한국벤처캐피탈협회에 따르면 지난 1월 공시 기준으로 KB인베스트먼트는 벤처펀드 운용자산 규모 1조770억원을 기록하며 VC업계 가운데 두 번째로 1조클럽에 진입했다. VC업계 1위인 한국투자파트너스가 2017년 처음으로 벤처펀드 운용자산 규모 1조원을 넘긴 이후 처음이다.
KB인베스트먼트의 성장세는 VC업계 내에서도 특히 주목할 만하다. 2015년말 7개 벤처펀드, 운용자산 규모 2540억원으로 업계 17위 수준이던 KB인베스트먼트는 본격적으로 운용자산 규모가 불어나기 시작했다. 2016년말 운용자산이 4450억원으로 불어 업계 10위권으로 도약을 시작해 2017년말에는 5830억원, 2018년말에는 7090억원까지 운용자산이 급증했다.
업계 안팎에서는 KB인베스트먼트의 기록적 성장이 국내 벤처투자 산업 확대의 단적인 사례로 평가한다. 벤처투자업계 관계자는 “금융권에서도 벤처투자 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높게 판단한 것도 2015년 무렵”이라면서 “KB금융이라는 든든한 출자자의 지원과 동시에 벤처투자시장에서 다년간 경력을 쌓은 인력의 합류가 성장의 바탕”이라고 말했다.
KB인베스트먼트를 필두로 실제 최근 4~5년간 벤처투자시장에 기존 금융권의 진출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추세다. 하나금융지주의 하나벤처스 출범에 이어, NH농협금융지주도 NH벤처투자를 출범하는 등 금융권의 진출이 줄잇는다.
벤처투자촉진법에 창업투자회사가 증권사와 자산운용사 등 금융권과 벤처펀드를 공동운용할 수 있도록 한 것도 벤처투자시장과 전통 금융시장의 경계가 점차 흐려지고 있어서다. KB인베스트먼트 등 금융지주 산하 VC가 계열사의 출자금을 바탕으로 급성장한 것과 마찬가지 사례가 점차 늘어나기를 기대하는 분위기다.
정성인 벤처캐피탈협회장은 “전통 금융권에서 벤처투자 시장에 진입하고 있지만, VC업계 자체로도 이미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는 만큼 우려보다는 기대가 크다”면서 “경쟁을 통해 VC업계도 더 발전할 수 있다”라고 전망했다.
◇시장 확대 힘입어 덩치커진 대형 VC
전체 펀드 결성 규모 증가와 신규 투자 확대와 함께 벤처투자시장 주요 참여자인 VC의 규모도 덩달아 커지는 추세다. 업계 1위를 수년째 지키고 있는 한국투자파트너스의 벤처투자 운용자산 규모는 1월 현재 1조6614억원에 이른다. 2015년말 8691억원에 비해 약 2배 가량 증가했다.
소프트뱅크벤처스, KTB네트워크, LB인베스트먼트, 인터베스트, 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 SBI인베스트먼트, 스마일게이트인베스트먼트, SV인베스트먼트 등 운용자산 상위 10개 VC는 일제히 5000억원 이상을 운용하며 평균 규모도 급성장했다. 2015년 당시까지만해도 운용자산이 5000억원이 넘는 VC는 한국투자파트너스와 LB인베스트먼트 두 군데에 불과했다.
운용자산 규모 확대와 함께 투자 범위도 다양해지고 있다. 한국투자파트너스는 국내 뿐만 아니라 미국, 중국을 넘어 동남아시아 등지로도 투자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LB인베스트먼트 역시 수년간 중국 투자를 이어오며 동남아 등 신시장으로 투자 범위를 넓히고 있다. 벤처투자촉진법에 창업투자회사가 해외투자 전문법인을 설립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이유도 벤처투자산업의 지평을 해외로 보다 확대하기 위해서다.
대형 VC뿐만 아니라 초기 투자 시장에 특화한 VC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독립계VC인 DSC인베스트먼트는 이미 액셀러레이터 슈미트를 설립해 초기 창업자에 대한 발굴과 보육에 한창이다. 벤처투자법 제정에 따라 액셀러레이터의 벤처펀드 결성, 초기 투자에 이은 후속투자 등 다양한 전략이 가능해진 만큼 초기 투자에 특화 전략을 구사하는 VC의 등장도 기대해 볼 수 있다.
◇초기투자 특화 VC, M&A·해외 특화 벤처투자그룹 나온다
창업투자회사가 주도하는 전문 벤처투자그룹의 등장도 기대해 볼 수 있다.
그간 창업투자회사는 운용규모가 증가하더라도 성장 단계에 접어든 기업에 투자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실제 2000년 당시 벤처붐을 주도했던 스틱인베스트먼트는 성장 단계 기업에 대한 투자 필요성이 점차 증가하면서 창투사가 아닌 대형 사모펀드(PEF)로 진화하는 방법을 택하기도 했다. 이후 벤처투자에 특화된 스틱벤처스를 인적분할을 통해 별도 법인으로 분리했다.
하지만 이번 벤처투자법 제정으로 창업투자회사 차원에서도 전문사모운용사를 자회사로 보유할 수 있게된 만큼 창업투자회사의 정체성을 이어가며 후속 투자에 나설 수 있는 셈이다.
전문사모운용사 뿐만 아니라 인수합병(M&A)에 특화된 기업인수합병기구(SPAC)까지도 자회사로 편입하는 것이 명시되면서 다양한 전략을 구사할 수 있을 전망이다. 실제 국내 증권 시장에 상장한 SPAC 가운데 상당수는 VC가 투자발기인으로 지분을 참여하고 있다.
벤처투자업계 관계자는 “그간 창업자와 벤처기업의 지원 기구로만 취급되던 창업투자회사가 제도화를 계기로 완전한 산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됐다”면서 “대형 VC는 스케일업에, 마이크로 VC는 스타트업에 집중할 수 있게 되는 등 다양한 전략을 추구하는 VC가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유근일기자 ryuryu@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