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n번방 방지법'으로 불리는 '디지털 성범죄 방지법'을 둘러싸고 인터넷 업계에 논란이 확산된다.
법안에 담길 내용 중 하나가 인터넷 사업자 책임 강화로, 디지털 성범죄물 유통 방지를 위한 삭제·필터링 등 기술적 조치를 모든 부가통신사업자에 의무화하기 때문이다. 포털과 메신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인터넷 업계는 법안 통과 시 문제가 될 사항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반발했다.
사업자가 이용자 통신 정보를 확인할 권한이 없는 등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 논의일 뿐더러 서비스 다양성과 이용자 자유를 침해할 소지도 크다고 지적했다. 디지털 성범죄는 인간 존엄을 파괴하는 행위기 때문에 반드시 근절 대책이 필요하다. 인터넷을 통해 벌어지는 일인 만큼 인터넷 기업도 일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업계 협의나 충분한 논의 없는 졸속 법안 처리는 사생활 침해 등 부작용만 키울 것이라는 우려가 커진다.
◇연이은 법안 발의
n번방 사건 이후 국회에서는 디지털 성범죄를 방지하기 위한 법안이 연이어 발의됐다. 백혜련·박광온·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각각 정보통신망법 일부개정법률안을, 송희경 미래통합당 의원은 성폭력처벌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법안마다 차이는 있지만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사에 성범죄물 전송 방지 조치(필터링)를 의무화한 것이 공통 사항으로 포함됐다.
지난 23일 정부가 내놓은 디지털 성범죄 방지대책에도 같은 내용이 담겼다. 정부는 40~50여곳인 웹하드 사업자에 적용하던 성범죄물 유통방지 기술을 1만5000여 부가통신사업자 전체에 적용토록 했다.
삭제 대상은 불법촬영물에서 불법편집물, 아동·청소년 성착취물로 확대했다. 제재 수단은 2000만원 이하 과태료에서 징벌적 과징금제로 강화했다. 인터넷 업계는 현실과 거리가 먼 내용이라고 지적했다.
◇통신비밀보호법 침해
인터넷 업계가 현재 논의되는 디지털 성범죄 방지법에서 꼽는 첫 번째 문제점은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이다. 통신비밀보호법은 범죄수사를 제외하고는 전기통신 감청 또는 통신사실확인자료 제공을 하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디지털 성범죄물을 필터로 거르기 위해선 인터넷망 유통 정보가 성범죄물인지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암호화된 정보를 복호화하거나 비공개 사이트를 들여다봐야 한다. 수사기관이 아닌 인터넷 업체에는 그럴 권한이 없다. 통신비밀보호법에 위반된다.
인터넷 업체 관계자는 “인터넷 업체가 필터를 통해 업로드, 전송 시점에서 성범죄물을 차단하거나 비공개 사이트를 모니터링하기 위해서는 통신비밀보호법 예외 적용이 필요하다”면서 “그러나 이용자 사생활을 침해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예외 적용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가능한 조치는 인터넷 업체 자체 정책에 의해 오픈된 사이트 등을 모니터링하고 단속하는 것뿐이라고 부연했다.
◇포털 등은 웹하드와 달라
디지털 성범죄 방지법에는 기술적 이슈도 있다. 포털과 SNS, 메신저 서비스 기업 등은 자사 서비스가 웹하드와는 다르기 때문에 필터링 같은 기술적 조치의무 적용이 어렵다는 입장이다.
웹하드는 업체 수가 적고 특수한 목적, 한시적 사용 등이 특징이다. 반면에 포털과 SNS, 메신저 등은 다양하고 확장성이 있으며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서비스다.
3500만~4000만명이 블로그, 카페, 채팅 등 다양한 서비스를 이용하는데 여기에 필터를 달면 시스템 부하가 커질 수밖에 없다. 다양한 서비스를 개발하기도 어려워진다. 중소 부가통신사업자의 경우 기술적 조치가 어렵고 비용 부담이 커질 수 있다.
필터링 효과에 의문점도 제기된다. 웹하드에 필터링 기술이 적용돼 있다지만 웹하드를 통한 불법 촬영물 유통이 근절되지 않기 때문이다. 효과가 크지도 않은데 이를 1만5000여 전체 부가통신사업에 확대 적용하는 게 의미가 있는지부터 따져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해외 사업자 규제 못하면 실효성 없어
박광온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디지털 성범죄 방지를 위해 발의한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에 역외적용 조항을 신설하고 국내 대리인을 두도록 규정했다. n번방 사건에 이용된 텔레그램 등 디지털 성범죄물 유통 서비스가 해외에 서버를 둔 해외 서비스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사가 해외에 있는 기업에 국내 법을 적용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다. 지난해 3월부터 국내 대리인 제도가 시행됐지만 국정감사 당시 대상 기업 중 국내 대리인을 지정한 기업은 20%에 불과했던 게 대표 사례다. 텔레그램의 경우 서버와 본사 위치도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역외조항이 시행되더라도 실질적으로 규제할 수단이 없다. 결국 국내외 기업 간 역차별 제도만 하나 더 생기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음란물이 해외 서버로 옮겨 다니기 때문에 처벌이 어려울 수 있다”면서 “국내 기업에 의무를 부과해서 공익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지는 생각해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존법과 중복
디지털 성범죄 방지법은 기존 법안과 중복 이슈도 안고 있다. 기존 법안을 적용해도 처리가 가능한데 이중 규제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아청법) 제11조는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을 제작·수입 또는 수출한 자는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명시했다. 또 영리를 목적으로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을 판매·대여·배포·제공하거나 이를 목적으로 소지·운반하거나 공연히 전시 또는 상영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했다.
사업자 책임 강화와 같은 맥락의 법으로는 전기통신사업법 제17조가 있다. 이 조항에는 '자신이 관리하는 정보통신망에서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을 발견하기 위해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조치를 취하지 아니하거나, 발견된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을 즉시 삭제하고 전송을 방지 또는 중단하는 기술적인 조치를 취하지 아니한 온라인서비스제공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 외에도 저작권법 제103조, 정보통신망법 제44조 등도 디지털 성범죄 방지법과 연관된다.
◇자율규제 강화가 현실적 대안
인터넷 업계는 지금 논의되는 디지털 성범죄 방지법은 수정해야 할 부분이 많기 때문에 시간을 두고 신중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적어도 사업자 책임 강화 부분은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더 많은 의견조율이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인터넷 기업이 자체 시행 중인 자율규제를 강화하는 게 현실적 대안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업체 규모별로 다르지만 모니터링 요원을 400~500명 운영하는 업체도 있다. 인공지능(AI)을 활용해 불건전 게시물을 적발하는 기술도 발전한다.
이상직 변호사는 “성착취 등 성범죄는 인간존중이라는 헌법가치를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행법을 강도 높게 적용해 처벌하는 게 맞다”면서 “그러나 신고나 인지 상황이 아닌데 기업이 이를 투망식으로 찾아내는 것은 지나친 의무일 수 있다”고 말했다.
문제가 되는 외국 서비스에 대해 시민 대응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김현경 서울과기대 교수는 “텔레그램은 범죄에 이용된 만큼 수사에 협조해야 하고, 시민에게는 저항의식이 요구된다”면서 “이 같은 외국 서비스는 이용하지 말자는 시민의식이나 캠페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안호천기자 hcan@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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