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위 자산운용사 블랙록(BlackRock)의 래리 핑크 회장은 지난 3월 주주들에게 서한을 발송했다. 내용이 흥미롭다.
서한에는 “이번 코로나19 사태는 단순히 금융시장과 단기성장률에만 압박을 가하는 것이 아니다. 적기공급(Just-in-time) 물류시스템에 심취하거나 국제적 항공여행에 의존하는 글로벌경제의 수많은 가정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고 쓰여 있었다. 또 “전 세계 사람들은 우리가 일하고, 소비하고, 여행하고, 모이는 방식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다. 이 위기를 벗어나면 전혀 다른 세상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현장에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몸소 체험하며 살고 있는 최고의 투자가다운 시각이다. 경제활동 형태가 바뀐다는 것은 산업과 사회구조, 노동의 급격한 변화를 수반한다. 그는 파괴적인 변화를 직감했다.
우리는 세계화와 효율성이라는 방향으로 달려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고통스러워하는 지금에 와서는 그 방향성에 대해 재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주위에서 목도되는 현상을 보면 변화의 전조를 느끼게 된다.
미국에 사는 친구가 푸념을 한다. “미국이 슈퍼대국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팬데믹에 직면하니 우리가 제대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총과 무기 외에는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진단키트나 산소호흡기는 물론 평소에 신경을 안 쓰고 살았던 생필품이나 마스크 부족 사태를 빗댄 얘기다.
방글라데시 의류공장 근로자들은 당장 먹고 살 걱정이 태산이다. 해외에서 주문을 취소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계약을 유지하는 업체들도 있다.
주문생산을 관리하는 임원은 절규한다. “우리는 도와달라는 게 아니다. 계약대로 이행하라는 것이다. 경기가 좋을 때는 천문학적 이득을 취하지 않았던가?”
싱가포르에는 농업이 없다. 모든 항공기는 국제선이다. 인구 580만의 도시국가이니 당연하다. 문제는 국경을 닫으면 먹고 사는 문제가 심각해진다. 또 타국 근로자의 감염이 급증하면서 값싼 인건비로 제공되던 건설, 청소와 같은 노동의 소중함을 일깨웠다.
제조업을 중심으로 우리는 저렴한 인건비, 브랜드, 품질관리의 조합을 찾아 세계화를 추진해왔다. 그런데 물류시스템의 글로벌 연결이 끊어질 때 그 여파는 아주 크다. 오늘날 경제활동은 세계적으로 복잡하게 엮여있다. 먹고 사는 문제는 디지털로 연결된다고 해서 해결되지는 않는다.
코로나 사태는 선진국들의 민낯을 여실히 드러냈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갈등, 불투명한 정보공유, 전문성이 결여된 결정 등이 대표적이다.
이에 따라 국가단위의 경제운용역량, 즉 먹는 것과 생필품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산업포트폴리오가 중요해졌다. 국민 안전과 건강을 지키는 양질의 의료체계, 기술 인프라, 투명한 절차, 비상통제 능력은 선진국으로 불리기 위한 기본 덕목이 됐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이미 주목 받고 있다. 한국은 비즈니스 활동을 제재(lockdown)한 적이 없다. 해외에서는 한국에서 크고 작은 조직이 평상시처럼 출퇴근하면서 감염률을 줄여가는 모습에 놀라워한다.
국민의 높은 민도(民度)와 정보기술(IT)에 대한 인식, 그리고 시스템의 탄력적 운영으로 위기를 극복한 것이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발휘한 회복력(resilience)은 한국의 저력을 보여줬다.
우리는 시대적 변곡점에 서있다. 중세시대 죽음의 흑사병이 지나간 후 찬란한 르네상스를 꽃피웠듯이, 코로나 이후에 기회가 온다는 기대감도 나온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새로운 시대를 이끄는 글로벌 리더십은 지금과 달라야 하지 않을까?
경제적 영향력을 가지려면 교역과 정보의 중심이 돼야 한다. 브랜드와 믿을 수 있는 플랫폼을 선호하듯이 글로벌 기업은 신뢰할 수 있는 국가를 찾는다.
역병과 위협에 대한 통제력, IT 인프라, K-컬처, 투명한 시스템 운용으로 경제활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대한민국을 상상해본다.
김홍선 SC제일은행 부행장 Philip.HS.Kim@s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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