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박사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3]대통령 코드 <9>리콴유(상)청렴한 독재

[박선경 박사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3]대통령 코드 <9>리콴유(상)청렴한 독재

리콴유는 1959년 싱가포르 초대 총리가 됐다. 그의 나이 서른다섯이었다. 2015년 그가 타계하자 국부(國父)니, 독재자니 하는 평가가 갈렸다. 31년간 총리직에 있었다. 독재자란 소리를 들을 만도 하다. 부패는 시장을 독점한 기업, 권력을 독점한 국가에 곰팡이처럼 번식한다. 고인 물은 반드시 썩는다.

싱가포르는 1963년 말레이시아 연방의 일원으로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말레이시아 연방 일원이었던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의 반중국 정서로 갈등을 겪었다. 종교, 언어, 화교문제 등 갈등 끝에 1965년 8월 말레이시아 연방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다. 말이 독립이지 쫓겨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난한 섬나라를 떠안은 리콴유는 탄식했다. “나는 이정표도 없는 길을 따라 미지의 목적지를 향한 여정에 오르게 되었구나.”

국가 과제는 산더미였다. 1968년 영국이 군사 철수를 발표하자 국민은 불안에 떨었다. 군대도 없었고 경제는 엉망이었다. 빈민촌이 즐비한 거리에 깡패가 들끓었다. 당시 국민총생산(GDP)은 400달러었다. 게다가 싱가포르 노조는 공산주의 세력이 장악했다. 싱가포르 노조는 '영국식 노동관행'을 그대로 답습했다. 파업과 폭동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노조들은 기업주 경영권까지 침해하고 생산력을 저하시켰다. 리콴유는 노조 관행을 없애기로 결심한다. 불법파업 주모자들을 체포하며 강경하게 대응했다. 노조들의 불법 파업에 진저리를 친 국민은 리콴유 정책에 호응했다.

리콴유는 명문 래플즈 중고등학교 졸업 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영국에서 사회보장제도가 가동되는 것을 목격했다. 건강보험은 유학생 리콴유에게도 적용되었다. 대학병원에서 마음껏 치료해도 비용 걱정이 없었다. 식료품도 배급받았다. 영국 정부는 엄청난 지출을 감당했다. 그는 뭔가 잘못돼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정부에 손을 내미는 것에 길들여질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는 사회가 발전할 수 없다. 이것은 인류 역사의 진리다.”

리콴유는 공정사회를 재정의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자기 몫을 가지게 하는 사회주의를 신봉했다. 이후 우리는 개인적 동기와 보상이야말로 생산경제의 근본임을 배웠다. 사람들의 능력은 똑같지 않으므로 만일 일과 보상이 정부에 의해 결정된다면 큰 승자는 아주 적고 대부분 사람들은 그저 그런 승리를 얻는데 지나지 않을 것이고 적잖은 패배자가 생겨날 것이다. 그로 인해 사회의 공평성은 손상되고 사회적 긴장이 초래된다.”

리콴유가 설계한 건 '공정사회'였다. 공정사회 정수(淨水)시스템은 부패척결이다. 리콴유는 특히 공직자나 공무원의 부패행위에 엄격했다. “탐욕스럽고 부패하고 타락한 아시아의 지도자들에게 환멸을 느꼈다”던 그는 부패혐의자 가족은 물론 친인척 금융기록까지 조사했다. 1965년, 리콴유의 오른팔 탄키아칸 장관이 처벌받았다. 1976년에는 그의 친구이자 국무장관이었던 위툰분이 기소됐다. 1986년 국가개발부장관 치앙완은 부패사건에 연루되자 리콴유 면담을 부탁했다. 리콴유는 그의 면담을 거절했다. 치앙완은 자살했다.

리콴유도 예외는 아니었다. 1995년 부동산 투기의혹에 휩싸여 금융조사위로부터 철저한 조사를 받았다. 결과는 무혐의였다. “내가 시행한 시스템이 나의 행적을 조사하고 상부에 보고할 수 있다는 것은 법 앞에 누구나 평등하다는 사실을 입증한 셈이다.”

최근 국제투명성기구(TI)가 발표한 부패인식지수(CPI)에서 싱가포르는 세계 3위를 기록했다. 싱가포르 국민은 리콴유를 청렴한 독재자로 기억한다. 국부라는 명예와 함께.

[박선경 박사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3]대통령 코드 <9>리콴유(상)청렴한 독재

박선경 남서울대 겸임교수 ssonno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