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패러다임에서 주도권을 먼저 거머쥐기 위한 경쟁이 가열되던 와중에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글로벌 경제 상황이 급변하면서 국가 간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으며, 서로 이해가 물려 있는 주체 간 관계가 철저한 이익 중심으로 변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 간 통상 마찰이 경제 외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고, 세계 통상 질서 재편으로 이어질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그동안 각국 정부와 글로벌 다국적기업이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해 왔지만 상황이 급박해지면서 정부가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됐다. 무엇보다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 경기를 회생시키는 일이 시급하게 됐다. 전대미문의 경기부양 정책을 쓰고 있지만 효과는 예측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각국은 4차 산업혁명의 큰 틀을 짜는 정책 설계자 또는 동력을 제공하는 지원군 역할에서 리쇼어링을 강하게 추진하는 한편 4차 산업혁명 기술을 조속히 성장 동력화하는 적극 개입으로 방향을 전환했으며, 자국 기업을 대신해 경쟁국들과 대리전을 수행하는 등 공공연히 기업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 이 같은 변화의 배경에는 글로벌 공급망을 안정 관리하는 것이 국가 안보의 한 부분이라는 강대국 인식이 깔려 있다. 각국의 이 같은 움직임은 새로운 통상 질서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세계화를 전면 후퇴시키고 한 나라가 경쟁력 있는 글로벌 공급망을 독자 구축하는 것은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에 미국과 중국을 축으로 하는 경제 블록으로 재편되고, 이들 간 마찰은 커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일본, 독일, 한국, 대만 등 소재나 부품 산업이 강점인 국가들은 그들의 향방에 따라 경제 블록 경쟁력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에 국제 블록화 추세로 곤란을 겪게 될 공산이 크다. 국가뿐만 아니라 4차 산업혁명 기술의 바탕이 되는 반도체, 첨단센서, 통신기기, 첨단장비 등을 생산하는 기업 역시 선택을 강요 당하는 비슷한 환경에 노출될 수 있다. 산업과 기술을 전략화하며 관세 장벽을 높이는 보호주의가 심화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기업들은 스스로 선도하고 있는 다국적기업들과의 협력을 강화해야 하며, 글로벌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정부와 협력하고 대응해야 한다.
보호주의 강화나 경제 블록화의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반도체 산업, 에너지 산업과 같이 여러 글로벌 공급망에 영향을 미치는 이른바 핵심 산업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이런 기술은 경제 블록이 형성될 때 선택을 강요받는 요소가 될 수 있지만 일방 희생을 막을 수 있는 지렛대로 작용할 수도 있다. 정부는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핵심 산업 경쟁력을 조속히 길러 내야 하며, 이들이 강대국의 전략 희생물이 되지 않도록 이들 산업과의 연대 강화와 전략 대응을 해야 한다.
대기업은 자신의 공급망에 연결돼 있는 중견기업 내지 중소기업과 새로운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중요한 시기에는 국내 핵심 기업이 공급망 안정화에 중요하기 때문에 이들 산업과 동반자 관계를 맺어야 한다. 또 핵심 기술을 갖춘 중소·중견기업과 전략 관계를 구축해야 하며, 유망 기업을 발굴해 강소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지금의 큰 리스크를 중소기업과 분담해서 생존할 수 있게 해야만 공급망 안정성을 높이고 복원력을 높일 수 있다. 그러나 공급망을 폐쇄 형태로 관리하면 원가 상승의 요인이 될 뿐만 아니라 핵심 기업들의 경쟁력이 약해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피해야 한다. 원칙이자 당연한 얘기로 들리겠지만 위기 때는 기본에 충실해서 대응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다음 주부터는 4차 산업혁명이 진행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을 때 나타날 모습을 시나리오로 엮어 볼 예정이다.
박종구 나노융합2020사업단장, '4차 산업혁명 보고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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