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 전 취재차 방문한 한 중견기업 대표와 차 한잔 나누는 자리에서 주고받은 말이 생각난다.
당시 이 중견기업 대표는 사업을 접고 서울 강남에 빌딩을 산 친구 얘기를 꺼냈다. 그때나 지금이나 국내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기는 녹록지 않은 것 같다.
20여년 전이지만 아직도 이 기억은 생생하다. 요지는 골치 아픈 사업을 접고 청산한 금액으로 임대료를 받으며 편안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의 선택이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다는 얘기였다.
이 대표의 이런 푸념에 기자는 지금 생각하면 낯 간지러운 얘기를 쏟아냈다.
당시 그 회사 직원은 1500여명. 직원 1명과 직접 연관된 가족만 4명(본인 포함), 이 직원이 직업을 잃었을 때 직간접 영향을 받는 사람(부부 양가의 부모와 직계 형제)을 포함하면 대략 20명. 이런 계산(1500×20) 아래 이 회사의 고용에는 대략 3만명의 삶이 얽혀 있다.
“대표님은 3만명의 삶에 직간접 영향을 미치는 고용을 만들어 내고 계신 분입니다. 편한 삶을 사시는 친구분의 선택도 좋지만 저는 대표님의 삶에 훨씬 큰 가치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이런 말이 내가 이 대표에게 건넨 말의 요지였다.
지금 생각하면 나보다 20년 넘게 더 산 분한테 주제넘게 보일 수 있지만 어떻게든 이 대표가 하는 일에 대해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담긴 말이었다.
20여년 동안 경제·기업 관련 취재를 해 오면서 사업하기 힘들어 하는 분들을 만날 때면 비슷한 얘기를 몇 번인가 다시 꺼내 든 기억이 있다.
대한민국에는 존경받는 기업인이 극히 드물다. 얼핏 생각해도 다섯 손가락, 좀 더 범위를 넓히면 열 손가락으로도 충분할 정도로 꼽힐 뿐이다. 특히 과정보다 결과가 우선시되던 우리 경제의 압축 성장 아래에서는 존경받는 기업인의 탄생은 더 어려웠을 것이다.
기업인에 대한 엄중한 잣대는 어쩌면 핏속에 녹아 있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잠재의식인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상대적 박탈감의 발로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분명한 건 우리 사회의 기업인에 대한 평가가 박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기자는 단 한 사람이라도 누군가에게 임금을 주는 사람을 일단 존경한다. 기업인에 대한 가장 기본적, 최소한의 응원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난달 26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 여부를 놓고 검찰 수사심의위원회의 '불기소 권고' 결정이 있었고, 검찰은 20여일이 지나도록 수용 여부를 결론 내지 못하고 있다.
수심위는 법조·학계·언론계·시민사회 인사들(150명 이상 250명 이하)로 구성된 위원 가운데 15명을 무작위로 추출해 구성했다. 이번 결정은 심의에 참여한 13명의 위원 가운데 과반인 10명 찬성으로 의결했다고 한다. 이에 앞서 수심위는 일반 시민들이 참여한 검찰시민위원회의 동의를 얻어 소집됐다.
수심위의 결정은 이런 상황에서 '그 정도면 됐다'는 '보편적 국민정서'가 반영된 것으로 봐야 한다. 이와 함께 삼성과 이재용 부회장이 우리나라 대표 기업, 대표 기업인으로서 만들어 온 이전의 노력에 대한 배려이자 앞으로의 기여에 대한 기대감의 투영이기도 하다.
일각에서 수심위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지만 이번 결정은 법과 제도 아래에서 절차를 밟아 이뤄진 것이다. 이 부회장이 일반인과 다른 위치에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로 인해 과한 잣대로 재단되는 것도 온당치 않아 보인다.
홍기범기자 kbho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