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퇴근길에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서 마스크를 쓴 시민들이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그때 한 남성이 기침하다가 마스크를 벗고서 도로 위 물웅덩이에다 가래를 뱉는다. 마침 차량이 지나가며 웅덩이 물을 튀기자 시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진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의 한 장면이다. 개봉 당시인 2006년에만 해도 생경한 풍경이어서 오랫동안 뇌리에 남은 장면이다. 14년 만에 다시 본 이 '영화 속 장면'에서는 이질감을 거의 느낄 수 없었다.
몇 개월 새 미지의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가 우리 속에 깊이 자리 잡았다. 동시에 불특정 다수에 대한 공포도 싹텄다. 지하철 안에서 누군가 기침하면 자연스레 시선이 쏠리고, 자리를 피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경계감은 '아는 사람'들 앞에선 급격히 풀어진다. 가족, 친구, 직장동료들과 만날 때면 마스크를 벗고 대화하고, 음식을 나눠 먹는다.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은 “코로나19는 정말 잔인한 바이러스”라고 표현했다. 내가 감염될 경우 나와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큰 피해를 주고, 시간이 지나 2·3차 감염으로 확산할 경우 공동체 전체에 피해가 갈 수 있다는 의미다.
수도권 중심으로 코로나19 확산세가 심상치 않다. 방역 당국은 '일촉즉발' 상황이라고 표현하며 사회적 거리 두기 1단계를 2단계로 상향했다. 2개월 전에 약속한 친구들과의 가족동반 모임을 취소했다. 서로를 경계해서라기보다는 혹시나 내가 가까운 사람들, 나아가 공동체에 피해를 주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감염 경로가 불분명한 이른바 '깜깜이 환자' 비율은 최근 늘어나는 추세이긴 하지만 대체로 10% 안팎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달 방역 당국이 일반 국민 3055명을 대상으로 항체 형성 여부를 조사한 결과 전체의 0.03%에 해당하는 단 1명에게서만 항체가 확인됐다. '집단면역'을 통한 코로나19 대응이 어렵다는 의미인 동시에 불특정 다수에 의해 나도 모르게 '깜깜이 감염'이 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금은 불특정 다수에 대한 근거 없는 공포감을 키우기보다 가족과 친지, 직장동료와 친구 등 가까운 사이일수록 사회적 거리 유지와 방역수칙 준수가 필요한 때다.
정현정기자 iam@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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