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예측할 때 흔히 귀납적 추론을 사용한다. 지금까지 해가 동쪽에서 떴으면 내일의 해도 동쪽에서 뜰 것이란 추론이다. 그러나 18세기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이러한 믿음에 의문을 제기했다. 자연의 한결 같음은 경험에 기댈 뿐 증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귀납적 추론만으로 미래를 예단할 수 없음을 절감하고 있다. 불과 몇 달 전까지 전 인류가 바이러스로 고통받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어제의 성공 방정식으로는 내일의 답을 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 산업계는 예측할 수 없는 혼돈의 시대를 어떻게 헤쳐가야 할까. 답은 '동행(同行)'에 있다. 혼자만의 역량으로는 날로 커지는 불확실성과 급변하는 산업 트렌드에 대응할 수 없다. 함께 해야 한다.
최근 한국전자기술연구원(KETI)은 우리 기업들과 함께 코로나19 역학조사 지원시스템을 개발해 K-방역에 앞장서고 있다. 평균 하루 이상 소요되던 확진자 동선 파악 시간을 10분 이내로 단축했다. 기업들이 데이터 수집·검증, 동선 분석·시각화 등 각사 핵심기술을 KETI의 데이터 플랫폼 위에 결합했다. 정부도 힘을 보탰다. 산·연·관이 팀플레이를 펼친 결과다.
KETI는 이러한 동행에 익숙하다. 1991년, 산업계 요청에 따라 KETI 설립이 추진됐고, 78개 대·중소기업이 뜻을 모아 재원을 마련했다. 핵심 전자부품 국산화를 통해 대일무역 역조를 극복하고, 중소기업 기술력 강화를 지원하기 위함이었다. 태생부터 기업과 함께한 것이다.
설립 초기, KETI는 단기간 큰 성취를 이뤘다. KETI가 중심이 돼 대·중소기업이 함께 하는 이른바 선단형(船團形) R&D를 통해 기술을 개발하고 제품을 수출했다. 국내 최초로 GSM 방식의 휴대폰을 개발해 우리 기업의 유럽향 휴대폰 수출을 도운 것과 세계 최초 HDTV 수상기용 칩셋 개발에 성공해 북미지역 TV 수출판로를 개척한 것이 대표 사례다. 모두가 하나돼 내딛은 수출신화의 첫걸음이었다.
2000년대엔 융·복합 패러다임에 따라 연구 분야를 전자·IT 전 분야로 확대했다. 예를 들어 스마트센서는 네트워크, 클라우드 등과 만나 IoT가 됐다. 단위 기술이 플랫폼으로 진화하면서 함께 하는 기업도 늘었다. KETI의 개방형 IoT 플랫폼 모비우스(Mobius)는 전 세계 1000여개 기업이 사용하는 글로벌 표준 플랫폼으로 자리잡았다.
이 외에도 나노탄소 필름히터, 라이다 광학엔진, AI 피킹 로봇 및 바이오 진단시스템 등 다양한 기술을 기업과 함께 개발해 사업화하고 있다. 작년 한해 KETI와 함께 R&D를 수행한 기업은 600여개에 달한다. 최근 KETI가 중소벤처기업부의 중소기업 지원 선도연구기관으로 선정된 것은 이러한 동행의 가치를 정부로부터 인정받은 귀중한 성과다.
동행의 가치만큼 중요한 것은 동행의 시작점과 방향성이다. 헝가리 출신의 세계적 수학자 조지 폴리아는 문제 해결보다 발견이 더욱 중요하다고 했다. R&D도 마찬가지다. 주의할 점은 대부분 문제가 현장에 있다는 것이다. KETI의 R&D가 우리 기업들의 현장에서 출발하는 이유다.
이번 8월, KETI는 국문명을 전자부품연구원에서 한국전자기술연구원으로 변경했다. 전자산업 전반에서 기업들과 동행하며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 제조업 르네상스, 한국형 뉴딜 등 새로운 성공 방정식을 만들겠다는 의지다. 한치 앞 미래를 예측하기 힘든 시대, 전자산업 앞길엔 수많은 위기와 기회가 안개처럼 겹쳐 있다. KETI와 따뜻한 동행으로 전자산업 미래에 청명한 가을 하늘이 펼쳐지길 기대한다.
김영삼 한국전자기술연구원 원장 ysmocie@ket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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