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량을 믿고 자신 있게 가속 페달을 밟으세요. 어떤 상황에서도 차량이 스스로 접지력을 유지할 겁니다.”
인스트럭터의 안내를 받고 페달을 힘껏 밟았다. 차량이 진흙과 자갈로 뒤덮인 오프로드와 깊게 파인 웅덩이를 아무렇지 않다는 듯 넘는다. 마지막 고지를 앞두고 등장한 가파른 경사로도 가뿐히 통과했다. 랜드로버가 내놓은 신형 '디펜더'로 해발 864m 유명산 정상에 오르는 순간이다.
이달 국내 판매를 시작한 신형 디펜더를 경기 양평군 유명산 일대에서 타봤다. 지난 72년 간 많은 랜드로버 팬들에게 사랑을 받은 랜드로버 아이코닉 모델 디펜더에 현대적 디자인과 첨단 기술을 접목해 화려하게 부활시킨 신차다. 큰 기대만큼 신형 디펜더는 랜드로버의 과거와 미래를 잇는 모델로 손색이 없을 만큼 높은 완성도를 보여줬다.
시승에 앞서 차체 내·외관을 천천히 둘러봤다. 신형 디펜더를 '재창조'라고 표현한 제리 맥거번 랜드로버 디자인총괄 디렉터 말처럼 외관은 고유의 개성 넘치는 디자인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적 느낌을 적절히 가미했다. 지붕에 자리한 알파인 라이트 윈도우, 사이드 오픈 테일 게이트, 후면에 장착한 스페어 타이어 등이 대표적이다.
차체는 과거 디펜더의 독창적 실루엣을 최적의 비율로 다시 설계했다. 전장 5018㎜에 1996㎜의 전폭, 1967mm의 전고를 갖췄다. 축간거리는 3022㎜에 달해 넉넉한 실내 공간을 확보했다. 일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과 비교해 월등히 높은 차고다. 무려 20인치에 달하는 휠을 장착할 만큼 커다란 사각형 휠하우스는 이 차량이 추구하는 성격을 말해준다.
실내에 들어서면 랜드로버가 추구해온 실용적 디자인이 돋보인다. 모듈화 설계를 거친 실내는 단순한 설계로 다양한 레저 활동에 적합하다. 가장 독특한 디자인 요소는 앞좌석 센터페시아를 가로지르는 마그네슘 합금 크로스카 빔이다. 차체를 구성하는 크로스카 빔 표면을 도어, 스티어링 휠 등 실내로 노출해 기계적 느낌을 표현했다.
실내 공간은 여유롭다. 3m가 넘은 축간거리를 바탕으로 2열의 레그룸은 992㎜의 길이를 확보했다. 40:20:40 분할 폴딩 시트는 자유롭게 접을 수 있어 요즘 인기 있는 차박 등에 효율적 공간 활용이 가능하다. 적재공간은 1075ℓ로 2열을 모두 접으면 2380ℓ까지 사용할 수 있다.
시동을 걸면 우렁찬 음색의 디젤 엔진이 깨어난다. 인제니움 2.0ℓ 4기통 디젤 엔진은 240마력의 최고출력과 43.9㎏·m의 최대토크를 발휘한다. 정차 시 시트 아래쪽으로 잔진동이 느껴진다. 그러나 주행을 시작하면 진동이나 소음을 잘 막아냈다.
유명산 중턱에 올라 오프로드 코스에 진입했다. 먼저 차량을 세우고 차고를 올렸다. 에어 서스펜션은 지상고를 75㎜까지 높여주고, 극단적 조건에서 추가로 70㎜를 연장할 수 있다. 버튼을 누르면 차체가 순식간에 올라간다. 이를 통해 극한 험지에서 최대 145㎜까지 차체를 높일 수 있다. 최대 도강 높이는 900㎜에 이른다. 차고를 높이니 안심하고 거친 오프로드를 달릴 수 있었다.
신형 디펜더는 컴포트, 에코, 스노우, 머드, 샌드, 암석 및 도강 모드 등 버튼 하나로 다양한 주행 조건을 설정할 수 있는 전자동 지형 반응 시스템을 갖췄다. 코스 상황에 따라 여러 모드를 사용했다. 미끄러운 구간에서는 머드와 샌드 모드를 번갈아 사용해 접지력을 높였다. 저단 기어를 유지하면서 페달을 떼더라도 출력 차단을 늦춰 최대한 차체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유도한다.
암석 등이 많아 차체 손상이 우려되는 곳에서는 터치스크린으로 카메라를 켜 전후좌우 상황을 살폈다. 화면을 오프로드 모드로 설정하면 구동력 배분이나 도로 경사각 등 다양한 정보도 볼 수 있다. 깊게 파인 웅덩이 등 더 거친 구간에서는 암석 및 도강 모드를 사용했다. 차체 속도가 억제되면서 네 바퀴에 강한 힘을 전달해 쉽게 탈출할 수 있었다.
오프로드를 달리면 차체가 많이 뒤틀리기 마련이지만, 막상 실내에서는 안정감이 느껴진다. 랜드로버는 신형 디펜더에 새로운 알루미늄 D7x 플랫폼을 개발, 적용했다. D7x 아키텍처 경량 알루미늄 모노코크 구조는 랜드로버 역사상 가장 견고한 차체를 제공한다. 일반적으로 튼튼하다고 알려진 프레임 구조 차체 설계보다 3배 더 강성이 높다.
이처럼 다양한 첨단 기술 덕분에 특별한 오프로드 운전 기술 없이도 쉽게 정상에 도달했다. 인스트럭터의 말처럼 차량을 믿고 달리면 가능했다. 내려갈 때는 내리막길 주행 제어장치가 한몫했다. 급격한 내리막에서 차량이 스스로 제동력을 가하고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는 기능이다. 암석 모드에서 속도를 5㎞/h 정도로 설정하니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도 안정적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온로드를 달렸다. 온로드에서는 기대가 크지 않았지만, 경쾌한 움직임이 놀라울 정도였다. 2505㎏에 달하는 차체가 가볍게 느껴질 만큼 치고 나가는 맛이 좋았다. 8단 자동변속기는 신속하게 변속을 진행한다. 변속기 모드를 스포츠(S)로 바꾸면 더 빠른 순간 가속도 가능했다.
핸들링이나 승차감도 기대 이상이다. 유격이 거의 없고 조작하는 만큼만 정직하게 차량 방향을 바꾼다. 차고가 높은 편인데도 좌우로 흔들리는 롤링이 적다. 어댑티브 다이내믹스 시스템이 연속 가변 댐핑을 사용해 차체를 제어하고 롤링을 최소화해 도심형 SUV 수준의 승차감을 보여줬다. 실시간으로 자동으로 변화하는 댐핑은 초당 최대 500회의 차체 움직임을 모니터링한다.
차체 무게 등을 고려하면 효율성도 괜찮다. 신형 디펜더 복합 연비는 9.6㎞/ℓ 수준이다. 가격은 시승차 D 240 SE 트림 기준 9560만원이다. 특별히 비교 대상이 없어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를 논하긴 무리지만, 개성 넘치는 정통 SUV를 원하는 소비자에 매력적 차량임은 분명하다.
정치연기자 chiye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