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안도시 해변으로 거대한 지진해일(쓰나미)이 모든 것을 삼킬 듯한 기세로 밀어닥쳐 온다. 그 시각에 한 운전자는 잠시 후 닥칠 불행을 모르고 해안가 방향으로 계속 차를 몬다. 곧 이어 그 승용차가 지나간 도로는 파도에 잠기고, 주변 건물은 무너지기도 한다. 과연 그 운전자는 어떻게 됐을까.
이 상황은 필자가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국제표준화기구(ISO) 지능형교통시스템기술위원회(TC204)에서 '재난 상황에서의 비상 대피와 복구'를 위한 신규 국제표준개발 회의 때 상영된 도호쿠 대지진 폐쇄회로(CC)TV 기록영상 내용이다. 만약 운전자가 쓰나미 경보를 제때 수신해서 쓰나미 반대 쪽으로만 방향을 틀었어도 결과는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사례는 재난 경보의 중요성을 단편으로 보여 주는 좋은 예다. 각국 대표 가운데 어느 누구도 해당 표준 개발에 반대할 수 없었다.
그 CCTV 영상은 2011년 3월 11일 일본에서 촬영된 것이다. 동일본 대지진이라 불리는 이 지진은 쓰나미를 동반한 9.0 강도의 초대형 지진으로 일본 북동부에 큰 피해를 입혔다. 혼슈를 2.4m 동쪽으로 이동시켰고, 확인된 피해자만 사망 1만5878명, 부상 6126명, 실종 713명이었다.
이웃나라인 대한민국은 안전한가. 한반도도 불의 고리라고 불리는 환태평양 지진대에 일부 속하고 있어 지진으로부터 안심할 수 없다. 최근 지진 발생 빈도도 높아지는 추세다. 태풍, 홍수, 화재, 코로나19 등 각종 자연·인위 재난이 심심찮게 발생되고 있어 재난 상황에서 국민의 안전을 지켜 주기 위한 재난경보시스템의 중요성은 더욱 증대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휴대폰에는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발령하는 재난경보문자가 수시로 수신되고 있다.
자동차에서도 운전 중에 차량 단말기로 재난경보메시지가 수시로 수신되어 내비게이션 안내가 멈추기도 한다.
'재난경보 민폐'라는 말까지 생겨나고 있다. 재난경보문자 수신을 중지하는 방법이 인터넷에 공유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하니 재난경보문자가 재난 상황에서 국민의 긴급대피 또는 대응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하는 의문을 들게 된다.
현재 문자 형태로 제공되는 재난경보 발령은 '재난문자방송 기준 및 운영 규정'에 의거한 것이다. 규정은 재난을 경중에 따라 세 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가장 높은 단계는 '위급재난'으로, 공습경보·경계경보·화생방경보 등 재난 유형에 해당될 때 발령된다. 수신 거부는 불가하며, 60데시벨(㏈) 이상의 단말 알림 소리를 동반한다. 다음 단계는 '긴급재난'이다. 테러, 방사성 물질 누출 예상 등 재난 시에 해당된다. 40㏈ 이상의 단말 알림 소리가 동반되며, 수신 거부가 가능하다. 마지막 단계는 위급 및 긴급재난을 제외한 재난경보 및 주의보 등이다. 단말 알림 소리는 일반문자 수신 설정 값이며, 수신 거부가 가능하다. 최근에 빈번히 수신되는 재난경보메시지는 대부분 '안전안내'다.
드물게 40㏈ 이상의 알림소리를 동반한 지진으로 인한 '긴급재난' 경보가 수신되기도 한다. 재난경보의 송출 주체는 기상청, 방역청 등 유관기관과 지자체들이다.
잦은 지진으로 인해 재난경보체계가 잘 갖춰진 일본 못지않게 미국은 지난 1951년부터 방송·통신망을 이용한 재난경보 체계를 구축, 지속해서 발전시켜 오고 있다. 2006년에는 '통합공공경보 및 경고시스템'(IPAWS)으로 확대하고 방송·통신 및 SNS 등 가용한 매체 대부분을 활용, 재난경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 경보체계에 의해 전국 단위의 경보는 대통령 권한으로, 주 단위는 주지사가 발령할 수 있으며, 기상청은 긴급 기상관련 경보를 발령할 수 있는 등 체계가 갖추어져있다. 또한 재난경보(EAS) 관련 법령 및 기술기준은 미국 연방 통신 위원회(FCC)가 관장하며, 연방재난안전청(FEMA)은 전국 단위 EAS 경보발령시스템 구축, 시험 및 훈련을 관장한다.
미국은 재난경보체계의 지속 향상과 보완에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 2016년에는 통신보안신뢰성상호운용성위원회(CSRIC)를 구성, '긴급경보 플랫폼, 소셜 미디어 및 보완 경보 방법-권장 전략 및 모범 사례, 최종 보고서 및 권장 사항'을 발간하기도 했다. 미국 내 다양한 기관과 전문가가 참여한 가운데 총 10개 작업반이 구성돼 분야별로 작업이 이뤄졌다. 이 가운데 방송·통신 외 소셜미디어 등 다양한 방송·통신 수단을 활용해서 재난 발생 시 경보를 제공하는 방법을 제시하기 위한 제2 작업반에만 방송사, 통신사,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플랫폼, 대학 등 50개 기관 및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우리는 불과 몇 년 전에 국가재난경보체계가 부재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세월호 사태'를 경험한 바 있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크게 달라졌다. 모든 재난 상황을 국민에게 신속히 알리고자 하는 중앙정부 및 지자체 공무원들의 충정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라 했는가. 국민이 시도 때도 없이 수신되는 재난경보문자에 둔감해지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도 금할 수 없다.
재난경보는 글자 그대로 긴급한 재난 상황에서 꼭 필요한 대피나 대응 방안을 제공하는 경보다. 우리는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정보통신(IT) 강국이다. 이루고자 하는 뜻과 정성이 모이면 모든 국민이 신뢰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국가재난경보체계를 갖출 것이라 확신한다.
이상운 남서울대 교수(ISO TC204 위원, ITU-R SG1/SG6 위원, 한국ITS학회 수석부회장) quattro@ns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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