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9월 1일이었다. 미국 뉴욕을 출발해 앵커리지를 경유해서 서울로 향하던 KAL 007편 여객기가 당시 소련 사할린 상공에서 수호이 전투기에 의해 격추됐다. 16개국 269명의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한국인은 105명 탑승했다. 9월 2~3일 정부는 특별 애도기간을 선포했고, 관공서와 가정에는 조기가 게양됐다. 이 사건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도 논의됐고, 각국은 당시 소련 규탄과 함께 모스크바 취항금지 등 제재 조치를 잇달아 했다.
격추된 여객기에는 일본인 승객도 28명 탑승했다. 일본인 희생자 유족은 사건 발생 1주기를 맞아 1984년 9월 1일 사할린 모네론 섬 북동쪽 18㎞ 해상에서 추모식을 가졌다. 16개국 유가족 가운데 처음으로 사건 해역을 방문했다. 희생자가 가장 많은 한국 유가족은 사건이 발생하고 무려 8년이 지난 1991년에 처음으로 해상추모식을 가질 수 있었다.
당시 일본은 소련과 수교 관계에 있어 다소 빠르게 유가족의 현장 방문을 추진할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소련과 정식 수교관계가 없었고 외교상의 항의도 미국을 경유해 전달했다. 1990년 한·소 수교가 이뤄지고 나서야 그 이듬해에 한국 유가족은 사건 해역을 방문할 수 있었다. 사람 목숨에는 경중이 없고 유가족 슬픔에도 경중이 없을 터인데 수교관계 유무가 유가족이 마음껏 목 놓아 울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을 갈라 놓은 셈이었다.
지난 9월 22일 서해 황산곶 앞바다에서 피살된 남측 공무원 사건을 두고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월북이든 표류이든 경위야 어떻든 간에 분명히 유가족이 있는 사건이다. 북측 군인에 의한 피격은 확정 사실이다. 그 이유와 잘잘못을 따지는 일이야 길고 지루한 공방전이 되겠지만 유가족의 슬픔을 달래는 일이 결코 길거나 지루해서는 안 될 것이다.
중대 범죄를 저지르고 도주한 자도 아니었고 이유가 어떠하든 우리 측 공무원이 공무를 수행하다가 사라져서 돌아오지 못한 상황이다. 두 아이의 아빠이자 한 사람의 남편이 출근했다가 귀가하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된 일이다. 만천하가 이 사실을 알고 있고, 군 당국은 우리 측 관측 장비로 사건의 전말을 파악했다고 발표했다.
남북이 모두 주검 수습을 위해 해상수색을 벌이고 있다. 주검이라도 찾아서 가족 품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다. 그러나 시시각각 돌변하는 해상 사정을 고려했을 때 언제 유가족의 품으로 주검이라도 돌아올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주검 수습을 위한 해상수색은 계속하더라도 남북 당국은 우선 유가족의 현장 방문과 해상추모식이 이뤄지도록 협조해야 한다. 남북공동조사와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은 계속하더라도 인도주의 차원에서 남북 당국이 해야 할 일은 먼저 해야 한다. 남북 당국이 일시와 장소를 정해서 남측 유가족이 사건 해상을 방문해 추모 시간을 보내면 되기 때문에 북한이 그토록 강조하는 코로나19 방역에도 문제가 없다. 북측은 통행의 편의와 안전을 보장해 주고 남측 인원과는 접촉 없이 먼 거리에서 지켜보기만 하면 될 일이다.
방송 카메라가 따라갈 일도 아니고 현장 취재기자가 따라갈 일도 아니다. 그저 유가족 시간을 내주면 되는 일이다. 시민도 자기가 지지하는 정파의 유불리에 따라 문제를 키우거나 줄이려고 인터넷에다 댓글 달고 퍼 나르고 할 일이 아니다. 문제를 키우거나 줄이려는 노력과 상관없이 가장을 잃은 한 가족의 슬픔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 대한민국이 그 사실을 기억하고 배려해 줄 수 있는 정도의 아량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과 옛 소련도 1990년 수교 후 처음 맞는 1991년의 KAL기 격추 사건 일에 맞춰 해상추모식부터 가졌다. 남북관계가 비록 정체돼 있다 하더라도 수교관계가 없다고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남북은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때부터 서로를 특수관계라고 규정한 바 있지 않은가. 남북 당국의 특수하고도 현명한 조치를 기대해 본다.
정대진 아주대 통일연구소 교수 jungdaejin@ajo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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