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품, 영수증, 종이, 플라스틱병, 세제나 샴푸, 책상과 신발에 이르기까지 화학물질은 우리 생활 곳곳에 널리 사용된다. 화학물질은 우리 일상을 편하게 하지만 입이나 피부 등을 통해 유입되면 일부 물질은 체내에서 자극을 일으키거나 생식기능 저하를 일으킨다. 2012년 우리 사회에 화학물질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던 가습기 살균제 사고가 대표적이다. 우리나라는 지난 2013년 가습기살균제 같은 사고 등의 재발을 막기 위해 1톤 이상 기존화학물질 등록 대상을 신고하게 했다. 바로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 이른바 '화평법'이다. 화평법은 2015년 1월부터 시행됐다. 기업은 신규물질 등록에 이어 내년까지는 1000톤 이상 사용하는 기존 물질도 등록해야 한다. 1년여가 남았지만 물질에 대한 자료를 찾거나 실험을 해야 하는 물질을 포함할 경우 준비 시간이 빠듯하다.
◇기업, 추가 등록에 분주
경인양행은 지난해 일본의 반도체·디스플레이 물질 3종 규제 때 국내에서 폴더블 스마트폰 핵심소재인 폴리이미드와 포토레지스트 관련 재료에 사용하는 기술을 보유한 업체로 주목을 받았다.
회사는 염료와 안료, 잉크, 무기화학 재료 등을 생산하는 정밀 화학업체다. 그만큼 많은 화학물질을 다룬다. 11개 물질은 연간 1000톤 이상 사용해 내년까지 물질 등록을 마쳐야 한다. 현재 11개 물질을 포함해 21종에 이르는 같은 물질을 사용하는 협의체를 구성해 등록을 추진 중이다.
김영길 경인양행 이사는 “내년까지 11종 기존물질을 등록해야 한다”며 “대부분 물질은 구성부터 등록 완료까지 정부가 지원하는 협의체에 속해 비용 부담을 덜 수 있다”고 말했다.
경인양행은 내년에 11종 물질을 신고한 이후에도 2024년까지 100톤 이상 59개 물질, 2027년까지 10톤 이상 97개 물질, 2030년까지 1톤 이상 113개 물질을 등록할 계획이다.
김 이사는 2015년 화평법 시행에 맞춰 화학물질관리시스템(ECMS)을 구축하며 자체 인벤토리와 조직을 구축한 것이 준비에 큰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사용 물질을 하나의 시스템에 등록하면서 해당 물질 대체제를 찾거나 관리하기 수월해진 것이다.
김 이사는 화평법에 대해 “유럽연합(EU)과 미국 등 선진국에서 이미 신화학물질관리제도(REACH)를 운영하고 있는 만큼 원료물질을 제조·수입 가공해 주로 수출하는 기업으로서 수출을 위해 꼭 필요한 제도”라고 평가했다. 더불어 제도를 통해 자체 물질을 확보해 기술 경쟁력 강화에도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대기업 A사는 치약, 화장품, 세정제 등 생활용품을 제조·판매한다. 내년까지 기존화학물질 16종 신고를 마쳐야 한다. 하지만 모든 물질을 단독으로 등록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16종 물질의 기존 유해성 자료에 대한 존재 여부와 출처 등을 일일이 조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기업 특성상 전문인력을 투입하거나 컨설팅 업체를 통해 받는 것도 한계가 있어 고민했다.
A사는 지난해 12월 정부가 기존 다른 사업자가 등록한 유해성 자료나 국내외 문헌자료 등 해당 화학물질 유해성을 입증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시름을 덜었다. 또 유해성이 낮거나 시장에 유통되지 않는 등록면제 조치 등이 취해졌다.
A사 관계자는 “지난해 관련법이 통과되면서 준비해야 할 서류가 간소화돼 담당자로선 업무 부담을 다소 덜게 됐다”고 말했다.
◇정부, 지원예산 5배로 확대
환경부는 올해 중소기업 등이 화학물질 등록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579억원을 책정해 지원사업을 시행 중이다. 지난해 111억원 대비 5배가 넘게 늘어난 규모다.
환경부는 2014년 4월부터 화평법 제도이행을 체계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화학산업계지원단'을 꾸려 운영했다.
한국환경공단 전문인력 6명이 온·오프라인을 통해 산업계에서 궁금해 하는 사항을 해소해주며 제도 이행을 지원한다. 화평법 관련 규정, 제도 안내서, 실무가이드와 국내외 유해성정보 조사, 첨부 생산 유해성시험자료를 제공한다. 간담회와 교육서비스도 진행한다.
이 가운데 기업이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컨설팅이다. 물질 등록에 드는 비용과 까다로운 절차를 이행하는데 전문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같은 물질을 사용하는 기업이 협의체를 구성하면 정부가 컨설팅기관을 통해 지원하는 방식이다. 컨설팅 기관은 담당자 인터뷰를 통해 해당 물질에 대해 유해성 자료 존재여부와 출처 등을 조사한다. 산업계 수요를 반영해 등록에 필요한 시험자료를 저가로 제공한다.
2018년 등록 당시 유해성 시험자료를 확보할 때만해도 국외자료 구매나 생산이 많았으나 최근 정부 컨설팅 지원 확대로 국내에서 직접 자료를 생산하거나 정부 생산 자료 활용 비율이 높아지는 추세다.
업계 관계자는 “특정 물질 등록을 위해선 국외에서 적게는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수억원에 이르는 자료를 구매하는 사례도 있었다”며 “정부 지원 컨설팅으로 서류준비부터 등록까지 많은 비용부담을 덜었다”고 전했다.
◇제도 안착 위해 보완책도 필요
정부가 화평법 등록을 위한 지원책을 강화하면서 기업 부담이 줄었지만 여전히 많은 중소기업이 등록에 어려움을 호소한다. 1000톤 이상 물질을 제조·유통하는 곳은 그나마 규모가 큰 편이지만 오는 2024년까지 등록해야 하는 100톤 이상 기업과 그 이하 기업은 영세 중소기업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또다른 업계 관계자는 “화평법 취지는 좋지만 모든 물질 등록은 제조업체 기밀사항으로 정보 제공이 안 되거나 관련 정보를 취득할 전문인력이 없는 사례도 있다”며 “정부 지원이 보다 촘촘히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물질 등록 후 관리 요건인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에 대한 문제도 거론된다. 화관법은 화평법과 함께 시행된 제도다.
이 관계자는 “유해 물질로 판정돼 화관법 대상에 포함되면 노출 범위에 관계없이 화관법을 따라야 해 새로운 시설 구축에 많은 비용이 든다”면서 “주변 노출도나 위해도에 따라 관리 방법을 유연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2018년 화평법 주요 개정사항(2019년 1월 시행)>
<기존화학물질 등록 현황>
<신규화학물질 등록현황>
<신규화학물질 신고 현황>
이경민기자 km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