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재난 시대에는 SF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될까? 적어도 현재 코로나19 시국 이야기라면, 그리고 내가 보고 들은 바에 한정한다면 그렇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 싶다.
일단 한국 SF 작가 중 6명이 앤솔러지 '팬데믹: 여섯 개의 세계'에 각양각색의 팬데믹 소재 단편을 게재했다. 작가가 아닌 사람도 마스크 착용을 거부하는 사람이 단체로 모여 시위를 벌였다거나 미국 대통령이 확진 판정을 받고 입원했다는 뉴스가 들려올 땐 자신이 상상하는 가장 무시무시한 전염병 아포칼립스 시나리오를 한 번씩 입에 올리게 마련이었으니까.
그리고 이런 식으로 사람 입에 오르내리던 전염병 아포칼립스 SF 시나리오 중에는 좀비 아포칼립스가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현실이 좀비 영화였다면 사태가 어떻게 진행됐을 것”이라든지, “실제로 좀비가 나타나도 사람은 이렇게 행동할 것이다” 같은 식으로.
생각해 보면 꽤나 이상한 일이다. 치명적 전염병은 현실의 일부이지만 소위 '좀비 바이러스'는 현실에 비슷하게라도 존재했던 적이 없거니와, 애초에 '좀비'라는 단어부터 아이티 보두 신앙에서 유래한 주술적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전염병이 창궐할 때 우리가 자연스레 좀비를 상상하는 건, 아마 창작물 속 좀비가 오컬트 호러에서 SF의 영역으로 걸어온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최초의 SF 중 하나로 거론되는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부터가 시체에 생명을 불어넣으려는 과학자 이야기다. 시체가 살아 움직인다는 불가능한 현상을 과학의 영역으로 끌어오기 위한 시도는 SF의 역사만큼 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28일 후'와 '부산행' 등 영화부터 게임 '바이오하자드'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단순히 과학적 방법으로 되살아난 시체가 아닌 '전염되는 좀비' 아이디어의 시발점을 찾는다면 읽어야 할 작품은 따로 있다. 바로 리처드 매시슨의 1954년 작 '나는 전설이다'.
'나는 전설이다'는 현대 좀비 아포칼립스 창작물의 어머니라 할 만한 작품이다. 현대 창작물에 흔히 등장하는 갖가지 소재가 원형 그대로 담겨 있음은 물론이다. 지구적 전염병, 문명 붕괴, 되살아난 시체의 공격, 외로운 생존자, 좀비 현상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해결책 모색……. 등장하지 않은 소재는 단 하나, '좀비' 뿐이다. '나는 전설이다'에는 좀비가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이 좀비 대신 흡혈귀로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물론 소설 속 흡혈귀는 박쥐나 안개로 변신할 수 있는 초자연적 존재가 아니다. 보통 사람보다 튼튼하지만 큰 상처를 입으면 죽고, 무엇보다 햇빛을 받으면 소멸하기에 낮에는 볕이 안 드는 곳에서 잠들어 있어야 한다. 주인공이자 인류 최후의 생존자 로버트 네빌은 밤에는 흡혈귀 습격을 피해 은신처에서 조용히 몸을 사리는 신세이지만, 낮이 되면 숨어 있는 흡혈귀를 하나하나 찾아 죽이고 다니는 사냥꾼이 된다. 한편으로는 도서관에서 책과 현미경을 가져와 연구한 끝에 흡혈귀의 정체가 (바이러스가 아닌)특수한 박테리아에 감염된 시체이며, 어쩌면 마늘 추출물로 박테리아를 죽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밝혀내기도 한다. 미지의 공포를 과학적으로 규명해낸 셈이다.
하지만 리처드 매시슨은 마법과 과학이 충돌할 때 과학의 손을 들어 주는 작가가 아니다. 이를테면 '마녀전쟁'에서는 폭력적인 마법을 장난치듯 다루는 어린 마녀에게 군대가 간단히 유린당하고, '어둠의 주술'과 '죽음의 사냥꾼'에서는 각각 아프리카 토착 종교의 저주와 북미 원주민의 전사 인형이 희생자를 습격한다(이 두 단편은 다른 문화권의 엄연한 전통을 멋대로 신비화해 공포의 대상으로 삼는 못된 전통을 계승했단 점에서 좀비 문학과의 연관성이 있다). '매드 하우스'나 '시체의 춤'처럼 과학의 언어를 빌려 기이한 현상을 설명하는 작품에서도 결국 매시슨은 공포에 초점을 맞춘다. 흡혈귀를 과학으로 해부하려는 로버트 네빌의 사투에도 불구하고 '나는 전설이다' 또한 결국에는 그러한 이야기의 연장선상에서 끝을 맺는다. 좀비 아포칼립스 문학의 시초임에도 좀비가 아닌 '흡혈귀'를 소재로 삼았기에 가능한 멋진 결말이니 직접 확인하길 바란다. 2007년작 영화 버전을 감독판이 아닌 극장판으로만 봤다면 더더욱!
흡혈귀와 좀비에 대한 흥미로운 통계가 하나 있다. 1953년부터 2009년까지 미국에서 만들어진 영화를 분류해 보았더니,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을 때는 흡혈귀 영화가, 반대로 공화당 출신 후보가 대통령직에 당선되었을 때는 좀비 영화가 더 많이 만들어졌다는 통계다. 이것이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각 정권에서 사람이 느끼는 주된 공포를 반영한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흡혈귀가 성적 방종으로 기존 사회의 가치관을 파괴하는 소수자이자 서민을 착취하는 부유한 엘리트라면, 좀비는 반대로 아무런 생각 없이 우르르 몰려다니며 폭력을 휘두르는 군중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코로나19가 창궐하는 세상을 바라보며 우리가 하필이면 현실에 존재하지도 않는 좀비 바이러스를 상상하는 것도 비슷하게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전설이다'에서 발원해 온 창작물 속으로 퍼져나간 좀비 바이러스는 평범한 바이러스와도 다르고, 시체를 되살리는 사악한 주술과도 다르다.
가까운 사람이 감염돼 이성을 잃고 나를 공격할지 모른다는 공포, 반대로 내가 가까운 사람을 공격할지 모른다는 공포, 당장 무기를 들고 나서지 않으면 좀비들이 그렇게 온 세상을 집어삼킬지 모른다는 공포를 불러온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어쩌면 좀비 아포칼립스 시나리오를 입에 올릴 때 우리는 무의식중에 전염병이나 되살아난 망자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세계적 재난 한가운데서도 우리가 계속 서로 죽일 듯이 싸워야만 하리라는-그리고 심지어 그 싸움에서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떠올리는 것이 아닐까.
이산화 소설가
GIST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같은 곳 대학원에서 물리화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온라인 연재 플랫폼 브릿G에서 '아마존 몰리'가 2017년 2분기 출판지원작에 선정되며 작가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이후 '증명된 사실'로 2018년 SF어워드 중단편소설 부문 우수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