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성장'을 국정철학으로 삼고 있는 정부의 의도와는 달리 현 국가과학기술계 연구환경은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 몰락하는 연구환경 개선을 위해서는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에 존재하는 해묵은 난제들을 우선 해결해야 한다. 안정적인 연구비 확보를 위한 과제중심예산제도(PBS) 개선 문제가 시급하다.
1996년에 도입된 PBS는 연구사업 기획, 예산 배분, 수주, 관리 등 연구관리체계를 사업 중심으로 운영하는 제도다. 지난 20여년 남짓 적용된 이 제도는 연구자가 직접 연구과제를 수주해 확보한 연구비로 인건비 일부를 충당해야 해 지속적으로 논란이 돼 왔다.
오늘날 출연연 인건비는 정부출연금과 연구과제 수주를 통해 확보된다. 정부출연금은 정부지원예산으로 안정된 반면 연구과제 수주는 연구자 재량에 따른 것으로 재원이 매우 불안정하다. 또한 최근 공공기관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출연연 학생연구원 근로계약 의무화 등으로 연구 인력 유동성까지 떨어지면서 연구과제 수주에 대한 연구자의 중하감은 더욱 커졌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자료에 따르면 기관별 연구자가 스스로 벌어야 하는 인건비 비율은 5~85% 수준으로 상이하지만 25개 출연연은 평균 46.5%(2017년 기준) 인건비를 연구과제 수주로 충당하며, 1년에 최대 7.8(2019년 기준)개 과제를 수행하고 있다.
연구과제가 늘 안정적으로 공급된다고 보장할 수 없는 데다 연구과제를 동시다발로 수행하면서 연구역량이 분산된다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연구자가 연구개발(R&D) 본연 역할 외에 연구과제를 수주하는데 더 많은 공을 들여야 한다.
PBS로 야기된 병폐는 비단 개인 차원 문제에서 그치지 않는다. 인건비 확보를 위해 출연연 연구자가 단기적, 소규모 과제에 집중하면서 연구 성과가 유기적으로 연계되지 못하고 계속 파편화되는 상황이다. 대학과 소모적 경쟁을 하거나 중복 연구를 하는 등 PBS로 인해 국가 차원 대형 연구에 집중해야 하는 출연연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다. 연구 주체 간 경쟁을 통한 연구능력 향상과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탄생한 시스템이 오히려 조직 근간을 붕괴시키는 셈이다.
PBS 개선은 혁신적 융·복합 연구로 대형 연구성과를 창출, 출연연에 주어진 본연의 임무를 다하기 위한 과기계의 오래된 숙원이다. 정부는 인건비 전액을 출연금으로 지급하거나, 출연금 내 인건비 비중을 출연연 전체 평균 80% 이상으로 조정해 연구자가 두려움 없이 혁신적인 연구에 몰두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또 출연금을 묶음예산으로 지급해 일정 비율 이내에서는 인건비로 전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등 현 인건비 수급제도의 개선을 적극 요청한다.
연구(硏究)란 단어는 '돌을 편평하게 갈다'라는 뜻의 '연'과 '길고 어두운 동굴 속에서 손으로 더듬어 입구를 찾는다'는 뜻의 '구'가 합쳐진 것이다. 연구자는 긴 시간동안 암흑 속에서 길을 찾는 법을 구하는 자다. 불확실한 미래에도 국가가 길을 잃지 않고 과학 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도록 자신의 몫을 행하는 것을 자긍심으로 삼아온 출연연 연구자들이다.
정부가 PBS의 허점을 외면한 사이에 과학 강국의 길을 찾아야 할 출연연 연구자들은 연구현장이 아닌 세일즈 현장으로 내몰리고 있다. 출연연에게 주어진 '역할과 책임'에 적합하지 않은 PBS로 인해, 연구자들은 생존과 존립이라는 불안한 연구환경 속으로 내몰렸고, 연구에 대한 자긍심은 이미 무너졌다. 이로 인한 국가 과학기술 역량 감소와 예상되는 국가 경쟁력 하락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가.
남승훈 출연연연구발전협의회총연합회(연총) 회장 shnahm@kriss.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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