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소부장 '히든 챔피언'

[기자수첩]소부장 '히든 챔피언'

최근 만난 한 소재·부품·장비(소부장)업계 중소기업 대표의 얼굴에는 수심의 그늘이 짙었다. 경쟁사보다 한발 앞서 연구개발(R&D)에 몰두한 그는 얼마전 글로벌 시장을 선도할 신기술을 확보했다. 그러나 코로나19 상황에서 신시장을 낙관하기 어려워 선뜻 거래에 나서는 고객사가 없다고 토로했다.

기술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투자비용을 걱정하는 그에게 정부가 추진하는 '소부장 으뜸기업'을 추천했다. 소부장 으뜸기업은 지난 4월 전면 개편된 '소재부품장비산업 경쟁력강화를 위한 특별조치법'에 따라 처음 시행하는 지원 사업이다. 오는 2024년까지 100개 소부장 으뜸기업을 선정,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게 골자다. 올해는 20개 업체를 선정한다.

그러나 그는 지원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막 개화하기 시작한 신시장이기 때문에 실적이 없는 데다 연구 인력 수나 R&D 비용 등이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소부장 으뜸기업은 현재 △총 매출에서 차지하는 핵심전략기술 관련 R&D 비용 지출 비중(3% 이상) △핵심전략기술과 관련한 국내외 지식재산권(등록 5건 이상) △핵심전략기술 관련 전문 연구 인력 4인 이상 등 3개 조건 가운데 2개 이상이 충족돼야 한다.

그는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얼마 전 한 중국 대기업이 시제품을 보고 긍정적 회신을 보냈다는 후문이다. 우리 손으로 어렵게 개발한 신기술이 중국으로 흘러나가는 셈이다.

우리 정부는 지난해 일본의 대 한국 수출 규제 이후 소부장 자립화에 공을 들이고 있다. 소부장 으뜸기업을 비롯한 다양한 정책 지원을 펼치며 기술 자립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기술력을 갖춘 '히든 챔피언'이 국내 가치사슬에서 자발적으로 이탈하는 사각지대가 있다.

소부장 자립화를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중소·중견기업 육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정부와 금융계가 기업의 기술·특허를 평가해서 자금을 지원하는 기술금융 제도 등의 확대를 심각히 고민해야 한다. 중소·중견기업 없는 공급망은 사상누각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윤희석기자 pionee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