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 분야 석학이자 두 차례나 과학기술처 장관을 역임한 정근모 박사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마치 '첫사랑' 같다고 얘기했다.
어느 곳, 어느 위치에 있어도 늘 KAIST를 염두에 뒀다고 했다. 서른 살 젊은 나이, KAIST 전신인 한국과학원(KAIS) 탄생의 수많은 곡절 속에 남은 강렬한 기억 때문이다. 50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당시 일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정 박사는 당시 미국의 도움에 대해 적잖은 고마움을 안고 있었다. 당시 미국이 '어글리 어메리칸'이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취한 행보가 우리에게 호재가 됐다고 했다. 직전의 미국은 경제대국으로서 전 세계를 도왔지만 '진정한 도움'을 주는 것에는 실패했다. 해결책으로 '물고기'가 아닌 '물고기를 잡는 법'을 전해주는 원조 정책을 지향했는데, 이것이 KAIS에 수혜를 전하게 된 직접 계기였다는 설명이다.
이는 정 박사가 평소 꿈꾸던 것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는 하버드 과학기술정책과정에 다닐 무렵 우수한 대학원을 만들어 개발도상국의 두뇌유출을 막을 수 있다는 내용의 논문을 쓴 적이 있다.
미국 원조정책을 이끌던 존 A. 해너 미국 국제원조처장과 맺은 인연이 상당한 도움으로 작용했다. 해너 처장은 28년간 미시간주립대 총장을 지낸 인물이다. 그리고 정 박사는 미시간주립대 총장 장학금을 받고 미국에서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는 “해너 처장을 찾아가 내 논문을 보여주며, 미국의 새로운 원조정책에 부합한다고 설명했다”며 “내 논문을 읽고는 '바로 이거다(This is it)'라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그에게는 가슴 벅찬 KAIS 잉태의 순간이었다.
정 박사는 해너 처장이 차관 금액을 기존보다 높게 설정해 줬다는 뒷얘기도 알려줬다. “450만달러를 얘기했는데, 도리어 '600만달러는 돼야 한다'고 답했다는 것이다.
정 박사는 “당시 500만달러 이상 예산이 소요되는 사안은 모든 진행 과정에 국제원조처장 제가가 필요했는데, 아마 본인이 직접 보고를 받고 신경 쓰고 싶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정 박사는 이후에도 학교 설립 대소사에 크게 기여했다. 설립 가능성 검토와 자문을 위해 미국이 파견한 터만 조사단에 참여했고 이들의 보고서 초안도 그가 잡았다.
미국에 둔 임시주미연락조정실을 만들고 현지 곳곳을 누비며 교수를 모집했다. 초대 부원장으로 활약했고 학내 과학기술사회연구실에서 과학기술정책 연구에 매진해 향후 우리나라 과학기술 정책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런 만큼 그는 지난 50년 동안의 KAIST 발전에 늘 기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특히 우리나라가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첨단 산업이 융성한 국가로 발전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는 것에 특히 자부심이 있었다.
산업발전을 촉발하는 인재를 키우고, 필요한 연구개발(R&D) 사업을 진행하는 핵심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왔다는 것이다. 수많은 기업과 연구기관의 발전 뒤에는 늘 KAIST 출신들이 자리했다는 설명이다. 벤처기업을 이끄는 KAIST 출신들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정 박사는 “우리나라 발전을 이끈 산업 현장 곳곳에 KAIST 출신들이 포진해 있다”며 “KAIST 설립을 지켜봐 온 입장에서 많은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앞으로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문제 해결에도 크게 기여했으면 하는 뜻도 전했다. 그는 “KAIST가 개척자가 돼 전 세계를 바꾸고, 가난과 희망 없음에 고생하는 젊은이들의 표본이 되길 바란다”며 “에너지나 지구온난화와 같은 범지구적 차원의 문제를 해결하고, 북한과 같은 곳에 희망을 주는 것이 앞으로 KAIST가 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대전=김영준기자 kyj85@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