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 한국과학기술원(KAIST) 총장 인선이 임박했다. 총장선임위원회는 13명 후보를 6명으로 추린 데 이어 내달 9일 최종 3인을 이사회에 올린다. 이르면 연말 최종 후보자가 선임된다. 일정대로라면 차기 총장은 내년 2월 정식으로 취임한다. 17번째 KAIST 총장이다. KAIST 총장은 지금까지 총 15명이었다. 대부분 2~3년 단임이었으며 서남표 총장만 유일하게 13·14대에 걸쳐 내리 7년을 재직했다.
17대 총장은 남다르다. 취임하는 2021년은 KAIST 설립 반세기를 맞는다. 1971년 한국과학원(KAIS)으로 출발해 1981년 KAIST로 확대 개편해 지금에 이르렀다. '50돌' KAIST는 대한민국 과학기술 역사 자체였다. 과학 불모지 시절에 연구중심 교육을 위한 기초를 닦았다. '과학특성화' 대학으로 설립돼 기초과학연구의 요람이자 과학인재 양성소로서 역할을 해냈다. KAIST는 올해 2월까지 6만7557명 졸업생을 배출했다. 과학기술계 인력의 25%를 차지한다. 창업한 기업도 1500여개에 달한다. 덕분에 대한민국 최고 공과대학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이다. 먼저 '국내용'이라는 비판이다. 세계 명문대학에 비하면 여전히 규모와 위상에서 한참 뒤처진다. 영국대학평가기관(QS)의 '세계대학평가'에 따르면 올해 KAIST는 서울대(37위)에 이어 39위를 차지했다. 최고의 국내 교육기관이지만 세계무대에서는 변방대학이다. 매년 '10위권 진입'을 선언하지만 10년 넘게 30위권에서 꿈쩍도 못하고 있다. 물론 150년 이상 역사와 전통을 가진 미국·유럽 대학과 단순 비교할 수 없다. 그래도 상황이 비슷한 아시아지역 대학 7개가 세계랭킹 30위권에 포진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거버넌스' 구조도 풀어야할 숙제다. 외풍에 취약하다. KAIST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지원하는 특성화 대학이다. 전체예산 중 25~30%가량을 정부 출연금으로 소화한다. 정부 입장에서는 지휘감독이 필요하고, 대학은 정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교수정원부터 수업료를 포함해 시시콜콜한 사안까지 견제를 받는다. 총장인선과 예산배정 등을 둘러싸고 불필요한 구설수에 오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거버넌스가 분명하지 않으면 치열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운영도 느슨하고 움직임도 둔하며 조직문화도 보수적으로 흐른다. 결국 변화에 둔감해지면서 경쟁력은 갈수록 추락하는 형국이다.
마지막으로 '정체성'이다. KAIST를 설립한 목적은 분명하다. 경제성장과 산업발전이었다. 설립 당시에 미국에서 '실리콘밸리 아버지'로 불리는 프레드릭 터먼 스탠퍼드대 부총장을 조사단장으로 파견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1970~1980년대까지는 대학원 중심으로 경제성장에 필요한 기초 과학역량을 쌓는데 주력했다. 1980년대 이후 산업화가 거세지면서 부족한 과학인재를 양성하는 데 초점을 뒀다. 지금은 취지가 모호해졌다. 위상도 예전과 달라졌다. 다른 일반 대학과 차이가 없다. 간판과 졸업장이 목적이라면 KAIST 존재 의미는 약해진다. 그렇다고 사명감을 가지고 개인보다 국가와 사회를 먼저 생각하라는 주문도 시대착오적이다.
2020년 인재상과 산업에 맞는 KAIST 역할을 재정립할 때다. 멀리, 크게 봐야한다. 지금은 빅테크 기업이 세상을 바꾸는 시대다. 시장가치 100억달러 이상 올린 테크기업 주변에는 어김없이 세계적인 공과대학이 있었다. 림과 노키아가 그랬고, 스탠퍼드대 덕분에 애플·페이스북·구글이 탄생했다. 워싱턴대는 아마존을 만들었다. 세계적인 테크기업 없이 명문 대학도 신기루에 불과하다. 50년을 맞는 KAIST, 17대 총장이 두고두고 새겨야 하는 대목이다.
취재총괄 부국장 bjk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