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쟁이니까 저희 자영업자 사정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식당 주인은 단호히 말하며 코로나19로 텅 빈 식당을 바라본다. 은행 이자와 월세로 살아갈 일이 막막하다. 정부가 배부한 카드를 들고 찾아오는 손님이 반갑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얄밉기도 하다. 월급에 재난지원금까지 받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자영업자를 이해한다고 자처해도 당사자가 아니면 동병상련의 아픔을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래도 이해를 위한 노력은 최소한 근접한 사고를 견인하는 방법임에는 틀림이 없다. 코로나19 사태로 불거지긴 했어도 이해 부족으로 생기는 사회의 괴리는 이미 현대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자신에 대한 관용과 인정은 이해의 출발이다. 타인과 비교하려는 유혹을 떨치고, 자신의 실수를 이해하는 연습으로 타인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결국은 특별한 이해의 노력 없이도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하는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이해 부족의 벽에 막혀 보이지 않던 새로운 길을 열어 주기도 한다. 코로나 블루라고 명명되는 우울증과 자기 비하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 현실에 대한 이해가 극복을 가져오는 명약이기 때문이다.
이해하려는 노력의 최대 수혜자는 자신이다. 가족과 이웃에 대한 이해가 자신이 사는 환경을 밝게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실망을 동반하지만 완벽한 이해를 추구할 필요는 없다. 할 수 있을 정도의 노력이 그만큼 결과를 가져온다. 지나친 이해가 정의와 공평을 파괴한다는 정치인들의 주장은 옳지 않다. 타인의 생각과 사회현상을 이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몸부림일 뿐이다. 특히 데이터와 인공지능(AI)으로 학습된 로봇이 행위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지식정보화 시대에서 타인의 이해와 무관하게 만들어진 그들의 행동은 사회의 독배가 될 수도 있다. 로봇은 자신을 코딩한 주인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물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해는 행위의 원인이나 결과에 대한 염려에 개의치 않는다. 코로나19의 3차 대유행을 누구의 탓으로 떠밀지도 않는다. 누구나 하는 실수를 비난하기 이전에 내일을 설계할 수 있는 비결이 된다. 단지 현재 상황을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악용하려는 생각을 지웠을 때 가능한 얘기다. 언론에 나타나는 정치권의 패거리 싸움은 이해에 반하는 결론을 얻으려 몸부림치는 것 같아 안타깝다. 현 정권의 몰락을 위해 국민을 나락에 빠뜨리는 선택을 응원하는 야당이나 아집에 눈이 멀어 독주하는 여당의 모습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일단은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성숙한 국민이 필요하다. 국민이 진정한 이해에 기반을 둔 정치인의 가치를 인정할 때가 돼야 해결될 고질병이다.
홈쇼핑에서 구매와 반품을 반복하는 아내를 이해하고 스포츠에 주말 시간을 다 쓰는 남편을 이해해야 한다는 식상한 얘기부터 한 국가의 외교 관계에서 불거진 사건까지 이해의 스펙트럼은 다양하고 넓다. 또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편협한 인간의 마음도 문제지만 이해의 결과가 가져올 기우를 떨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해는 지나친 욕심을 버린 상태에서 가능하다. 과거보다 조금만 더 허용하려는 마음의 문을 열면 가능하다. 이해는 자신만을 위한 노력을 넘어 인류의 행복을 재건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정태명 성균관대 소프트웨어학과 교수 tmchung@skku.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