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기술혁신과 산업의 패러다임 이동을 주목하자

[기고]기술혁신과 산업의 패러다임 이동을 주목하자

대한민국 산업 발전과 경제 성장은 과학기술 혁신 역량 내재화를 통한 대기업 중심 수출 주도형 경제 모델에 기반을 두고 있다. 외국인 직접 투자를 제한하는 대신 국가가 국내 기업과 산업에 필요한 기술 및 인재 공급 등을 정부출연연구기관·한국과학기술원(KAIST) 육성 등을 통해 지원하고, 기업이 필요한 자금을 국내외에서 조달할 수 있도록 해 줬다. 그리고 산업별로 대기업을 지원해 대규모 물량 투입에 기반을 둔 산업 발전 효율성을 추구했고, 고용 수요가 늘어나자 대학의 외형 성장도 함께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기술 혁신과 산업 패러다임은 선형 혁신과 시스템 혁신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성장 모델은 이제 유효하지 않게 됐다. 대기업은 더 이상 고용을 창출하지 못하고 있고, 중소·중견기업의 혁신 역량은 취약하다. 이 때문에 고용 양극화와 불안정 구조가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대학 인재 양성 시스템은 기술 혁신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으며, 출연연은 외형 성장에도 혁신 효과를 충분히 내지 못하고 있다. 신종 질병과 기후변화, 미세플라스틱과 미세먼지 등 다양한 사회문제에 과학기술 혁신은 대응이 뒤처지고 있다. 수도권과 지방 격차는 불균형을 넘어 대한민국 위기의 진원지가 되고 있다. 대부분의 주력 산업은 에너지 다소비와 온실가스 대량 배출 구조에 놓여 있고, 에너지 전환과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새로운 혁신은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다. 선형 혁신과 시스템 혁신의 유효성이 다하고, 오히려 그 안에 갇혀 새로운 혁신이 막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지난 시기 축적해 온 기술 혁신 역량이 절대 부족하지 않다. 이제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기반 둔 새로운 기술 혁신, 산업 발전 모델을 만들어야 하는 시점이다. 이 과정에서 지향해야 하거나 유념해야 할 부분을 몇 가지 제안해 본다.

첫째 기술 혁신 양상이 기술-산업 중심 관계에서 기술-사회-산업 관계로 변화하고 있다. 신종 감염병과 기후변화 대응은 사회의 재난 예방과 함께 기술 혁신 및 신산업 등장을 예고하고 있다. 도시 집중과 고령화에 따른 주택, 교통, 교육, 복지 등 이슈가 기술 혁신을 만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에 기반을 둔 시장이 열리고 있다. 기술과 사회·산업 변화의 통합 접근 및 정책을 통해 변화 양상을 새로운 혁신 동력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둘째 단일 기술의 사업화, 산업 분야별 전문화를 토대로 구축해 온 시스템이 융합기술 혁신 양상으로 변화하면서 기존 산·학·연 혁신 주체의 차별화와 협력을 강조해 온 시스템 접근이 약해지고 다양한 연구 및 혁신 모델이 출현하고 있다. 과학기술과 인문사회 분야의 단절, 학문 분야 및 산·학·연 간 경계, 기술·산업의 전문화를 넘어서는 새로운 방식의 융합 연구와 혁신을 본격 추진하는 한편 융합 혁신과 혁신 확산의 선순환을 촉진하는 융합플랫폼 생태계를 발전시켜야 한다.

셋째 지역 주도 연구와 기술 혁신의 잠재력 및 기회에 다시 주목해야 한다. 국가 연구개발(R&D) 투자 규모가 새해에 27조원을 넘어설 예정인 가운데 30조원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연구과제중심제도(PBS)에 기반을 둔 중앙 중심의 R&D와 산업 육성 구조로는 투자 효율성 및 효과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반면에 중앙의 몸집이 무겁고 부처 간 장벽에 기술-사회-산업 통합 정책과 융합 연구 혁신 생태계 구축은 더디다. 지역에서 새로운 통합·융합 정책, 연구, 기술 혁신의 선도 모델 및 성과를 구축함으로써 국가 혁신과 산업 혁신의 틀을 전환하는 시도가 적극 모색돼야 한다. 이때 지역은 행정구역상의 광역자치단체일 수도 있고, 좀 더 넓은 범위의 메가 시티 또는 메가 지역이 되기도 하고, 남북한과 아시아를 묶는 영역을 대상으로 삼을 수도 있다.

대전은 국가가 첨단기술 대덕연구단지와 대덕연구개발특구로 육성해 온 지역이고, 최근 국제과학비즈니스 벨트 및 4차 산업혁명 특별시 등 국가 혁신과 지역 혁신을 동시에 시험하고 있는 전략 요충지다. 대전시는 과학산업국 설치, 과학산업특보 임명, 지방자치단체 최초의 과학부시장제 도입, 대전과학산업진흥원 설립, 혁신 지원 기관들의 경제과학 상생협의회 구축 등 노력을 하고 있다. 특히 대전과학산업진흥원은 지역 연구 및 혁신 투자의 효율성·효과성 제고 방안과 대덕연구개발특구를 지역 자산에 연결해 지역-사회-산업 혁신의 통합 접근, 융합 연구와 혁신 촉진, 융합연구 혁신 플랫폼 구축 등을 본격 추진하고 있다. 새로운 기술 혁신 및 산업의 패러다임을 지역 차원에서 앞장서서 구현함으로써 대한민국 성장 모델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가능성과 기회를 넓히려고 한다. 다른 지역과의 협력과 연대를 통해 확산할 수 있다면 우리는 기술 혁신과 산업의 패러다임 이동을 현실화할 수 있을 것이다.

고영주 대전과학산업진흥원장 yjko@distep.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