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의회 도서관에 소장된 정보를 각설탕 크기의 장치에 집어넣을 수 있는 기술.” 지금으로부터 꼭 21년 전 오늘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이 캘리포니아공대에서 국가나노기술개발계획을 발표하면서 나노기술을 소개한 내용의 일부이다. 클린턴 대통령 연설은 나노기술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리처드 파인먼이 1959년 같은 장소에서 한 연설에 대한 오마주다. 파인먼 교수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전집을 핀 머리에 새겨 넣을 수 있는 기술'에 대해 설파하면서 “저 작은 세계에는 할 일이 무궁무진하게 많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20세기 후반은 마이크로칩으로 대표되는 전자공학 전성기였다. 디지털에 기반을 둔 문명의 거대한 진전을 이룬 시기였다. 마이크로칩 안의 회로 선폭을 줄일 수 있는 기술 발전으로 해를 거듭할수록 칩에 담을 수 있는 디지털정보 양은 기하급수로 증가했다. 이를 기반으로 인류는 유례없는 디지털 혁명의 과실을 맛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반도체 회로 선폭이 100나노미터(㎚)에 근접한 20세기 말에 이르자 기존 방식으로는 더 이상 칩 용량을 늘일 수 없다는 기술상의 한계에 부닥치게 됐다. 100㎚ 이하가 되면 양자역학 현상이 발현되기 때문에 기존 소자 설계 기술을 적용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반도체소자를 구성하는 기존 물질도 적용하기 어려워졌다. 100㎚ 이하 구조를 만드는 방법도 기존 방식을 적용하기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00㎚ 이하 크기 영역에서 어떤 물리 현상이 발생하는지를 예측하는 한편 물질을 제어함으로써 우리가 원하는 특성을 발현하도록 하게 하는 새로운 기술, 즉 나노기술을 육성해야 하는 필요성이 대두됐다.
후발 반도체 제조국이던 우리나라도 비단 반도체뿐만 아니라 나노기술의 미래 파급력 전방위에 주목해서 미국 다음으로 2001년 나노기술종합발전계획을 수립하고 나노기술 육성에 나섰다. 2002년에는 미국보다 한 해 빨리 나노기술 육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함으로써 나노기술 육성의 법률 근간을 마련했다. 나노기술종합발전계획은 5년마다 10년 계획을 제시하도록 나노기술개발촉진법에 명시돼 있다. 현재까지 총 네 차례 계획이 수립됐으며, 올해 제5기 계획을 수립해야 하는 시점이다. 그동안 정부 정책 지원을 통해 우리나라의 나노기술 경쟁력은 미국, 일본, 독일에 이어 4위권으로 성장했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이차전지 등 국가 주력 산업 요소요소에서 나노기술은 괄목할 혁신을 이뤄 냈다. 나노기술이 이처럼 우리나라 과학기술 위상을 높이는 견인차가 되고, 우리 산업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된 것은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정부가 꾸준히 나노기술 육성 의지를 유지해 온 것에서 기인한다. 우리나라 과학기술 정책 가운데 나노기술종합발전계획처럼 20년의 오랜 기간 지속 유지돼 온 계획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 산업 분야에 나노기술이 스며들어 가고, 나노기술이 여러 학문 분야에 걸쳐 발전하다 보니 최근 나노기술을 별도의 과학기술 분야로 육성할 필요가 있느냐는 회의 어린 의견도 심심찮게 대두되고 있다. 20살 성년까지 잘 길러 줬으니 이제는 스스로 자생해야 할 법도 하다. 나노기술이 제조업 혁신의 아이콘으로 성장한 지금이야말로 나노기술을 통해 일본 수출 규제, 미-중 무역 갈등 등으로 초래된 글로벌가치사슬(GVC) 재편을 우리나라가 주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된다. 제5기 나노기술종합발전계획은 바로 이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또 다른 10년을 준비하는 이번 5기 계획은 이제 성년 모습으로 우리나라가 미래 산업 GVC를 주도하고 글로벌 미래사회를 선도할 수 있도록 나노기술 혁신의 새로운 장을 마련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최영진 세종대 교수 jini38@sejo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