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계가 모처럼 고무돼 있다. 새로운 대한상의 사령탑 때문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추대됐다. 수락의사도 밝혔다. 최 회장은 “국가경제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겠다”고 의지를 보였다. 이변이 없다면 이달 임시총회를 거쳐 3월께 정식으로 회장에 오른다. 4대 그룹 총수가 상의 회장을 맡기는 처음이다. 더구나 최 회장은 재계 서열 3위지만 그룹 '맏형' 역할을 자임해 왔다. 재계 상징적 인물이다. 상의 입장에서는 천군만마가 따로 없을 것이다.
그동안 상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경제 5단체 가운데 대정부를 향한 목소리가 가장 컸다. 박용만 회장의 스타일과 리더십 덕분이었다. 따져보면 상의를 대체할 다른 경제단체도 마땅치 않았다. 경영자총협회는 노사문제 외에는 의견 내기가 쉽지 않았고 수출 경쟁력 강화를 위해 설립한 무역협회는 통상에 집중하기도 버거웠다. 중소기업중앙회는 회원사 규모는 크지만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이 중심이었다. 그나마 전국경제인연합회가 구심 역할을 했지만 2016년 국정농단 사태로 직격탄을 맞아 아직도 '넉다운' 상황이다. 전경련 빈자리가 커지면서 상의의 급부상은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과거 상의는 그렇지 않았다. 120년 설립 역사에, 회원사도 18만개에 달하는 경제단체지만 존재감은 크지 않았다. 상의가 갖는 특수성 때문이었다. 대기업부터 중소기업까지 회원사를 아우르면서 의견조율이 쉽지 않았고 법정 경제단체라는 성격 때문에 활동에도 제약이 많았다. 무엇보다 4대 그룹을 포함한 재계가 소극적이었다. 회장을 SK가 맡으면서 기대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
재계의 맏형 총수라는 무게감 때문일까. 취임 전이지만 끝도 없이 요구가 쏟아진다. 경제 활성화에서 규제개혁, 경제악법 저지, 사회가치 실현, 합리적 노사관계 수립, 기업 이미지 개선까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주문이 많다. 경제계에서 바라는 대한상의는 한 마디로 정부를 향한 소통 창구로서 역할이다. 정부가 기업을 배제한다는 소외감이 큰 데다 목소리를 전달할 마땅한 대표 채널이 없었기에 신임 회장에게 기대가 쏠리는 것이다. 당연한 반응이다.
기업 목소리를 전달하는 대변인 역할은 경제단체의 주요 임무다. 하지만 본질은 아니다. 여러 업무 중 하나다. 이미 명실상부하게 재계 대변인을 자부했던 전경련이 시행착오를 겪었다. 전경련에서 대한상의로 간판만 바뀌었을 뿐 본질이 그대로라면, 정부와 경제계의 생산적 관계는 결코 만들어질 수 없다. 정부는 여전히 경제단체를 '재벌의 하수인' 정도 시선으로 보고 있다. 재계는 정부를 기업에 비해 효율성이 한참 떨어지는 '삼류'로 인식한다. '대변인' 역할로는 간극을 메울 수 없다. 새로운 위상을 고민해야 할 때다.
대안은 사회현안을 같이 고민하는 '싱크탱크' 역할이다. 정책에 수동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입안 단계부터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체계를 같이 만들 수 있는 역량을 갖춰야 한다. 기업과 경제 뿐 아니라 사회 문제를 위해 머리를 맞댈 수준의 지위를 확보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정부가 아닌 국민과 먼저 소통하고 국가와 경제를 위해 정책이나 의제도 제시해야 한다.
고 최종현 SK그룹 회장이 전경련을 맡은 시점이 93년이다. 그로부터 30여년이 흘렀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다시 대한상의를 맡는다. 그 때와 판박이라면 대한민국 역사에서 정부와 기업의 관계가 전혀 진척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새판을 짜야 한다. 과거와 달라야 한다. 새로운 그림은 기업이 먼저 시작해야 한다. 훨씬 빠르고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이 뛴다면 정부도 따라올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는 그렇게 작동한다.
취재총괄 부국장 bjk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