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매년 수많은 정책을 쏟아낸다. 총선거나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은 정책 공약을 다투어 발표한다. 행정부도 매년 연두업무보고를 앞두고 새로운 정책을 개발해서 선보이는 데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의 외형 확대에도 과연 우리가 품질 좋은 정책을 하고 있는가는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주변의 단편 사례를 살펴보자.
한 가지 예이지만 김모 국회의원은 법안 발의를 하면서 주택공급 개선 정책에 관한 내용을 제안했다. 내 집 마련에 걱정이 많은 국민에게 큰 도움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중앙정부에서 정책화된 내용은 김 의원 구상과 달랐다. 정책을 집행하는 지방자치단체는 기획 의도를 전혀 파악하고 있지 못한 듯했다. 지역구를 방문하니 원성이 자자하다.
다른 사례도 있다. 정부 중앙부처에서 일하는 이모 과장은 해외 선진국 제도를 벤치마킹한 정책을 개발해 시행하고 있다. 분명히 해외에서 우수한 성공사례로 평가된 정책이었지만 우리나라에서 시행하다 보니 예상치 못한 부작용과 돌발변수가 많아 애를 먹고 있다. 좋은 내용인데 왜 매끄럽게 시행되지 않는지 답답할 따름이다.
김 의원과 이 과장이 겪는 어려움이 제각각인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다. 모두 '철학 부재'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는 그동안 우리가 간과해 온 중요한 핵심 가치다.
김 의원은 정책 철학 전달의 중요성을 인지해야 한다. 부패 방지를 위해 기획과 집행을 분리하는 우리나라 행정 특성상 기획 당시의 철학이 정책 집행 현장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정책의 개발 과정이란 세세한 것을 채우면서 집행에 적합하도록 다듬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정책의 기본 골격, 즉 정책 철학의 본질이 변하면 안 된다. 정책 철학이 유지되지 않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이 과장은 벤치마킹하는 정책 이면의 철학 배경을 살펴야 한다. 그 나라에서 그러한 정책을 추진하게 된 데는 다 그만한 사정과 이유가 있다. 철학 배경을 간과하고 눈에 보이는 결과만을 벤치마킹하려 한다면 당연히 벤치마킹한 나라만큼의 효과는 거두지 못할 것이다.
예를 들어 기술규제 이슈가 대두되면서 허용을 원칙으로 하는 '네거티브 규제'를 전격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러나 이 제도를 활용하는 영미권은 법철학이 다르다는 점도 살펴야 한다. 징벌성 손해배상과 소비자 집단소송이라는 이중 안전장치가 있어서 원칙 허용이라는 과감한 시도가 가능하다.
한때 우리나라는 이황과 이이의 이기론 논쟁처럼 철학 가치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지만 놀라운 경제성장을 단기간에 이루면서 외형 팽창과 눈에 보이는 성과에 집착하게 된 면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철학 가치를 경시하면 안 된다. 수많은 정책이 우리나라에서 펼쳐지고 있지만 분야별로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정책이 있는지, 우리의 정책 철학은 무엇인지 자문해 볼 일이다. 새로운 정책 개발에 대한 부담을 과감히 떨쳐 내고 좀 더 긴 호흡으로 정책 개선과 정책 철학 정립에 힘써야 할 때다.
안준모 서강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 ahn.joonm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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