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대 국회에서 접수된 법률안은 2만4141건이며, 이 가운데 의원 발의안이 2만3047건으로 발의 건수와 의원발의안 비율 모두 역대 최대다. 불과 20여년 전 15대 국회(1996~2000년)가 총 1951건 법률안에 의원발의 1144건, 정부제출 807건이었으니 오늘날 국회는 그야말로 의원입법 전성기다.
의원발의안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것은 외형적으로는 의원들의 왕성한 입법 활동을 보여 주는 것으로, 입법기관으로서 국회의원의 위상이 커졌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실제로도 그러할까.
의원발의 법안에서 동일 사항을 여러 법률에 넣는 이른바 '복붙법', 이전 국회에서 폐기된 법안을 복사하는 '재탕법' 등 품질보다 양에 치중하는 현상도 문제지만 정부의 '청부입법'은 오늘날 입법 부실을 야기하는 주원인이라 할 수 있다. 각 부처가 정부안으로 법안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입법 계획 수립부터 관계기관 협의, 당정 협의, 공청회 등을 거쳐 규제 심사와 법제처 심사를 모두 통과해야 한다. 때로는 대통령 재가를 받기 전에 거치는 차관회의, 국무회의에서 각 부처를 대표하는 국무위원들과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승부도 불사해야 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법안 내용이 예산 조치를 수반하는 경우에는 관련한 비용추계서는 물론 재원 조달 방안까지 의안에 첨부해서 국회에 제출해야 한다. 이 과정을 거치며 다양한 이해 당사자와 전문가 의견을 담아 규제는 더 신중해지고, 법안 집행 시 고려 사항도 구체화된다.
이에 비해 국회의원의 법안발의는 의원 10인의 서명만 받으면 가능하다. 국회 법제실 검토나 공청회, 기타 의견수렴 과정도 임의적 절차일 뿐이다. 재원 조달 방안을 첨부할 필요도 없다. 이와 같은 입안 절차의 비대칭성은 정부로 하여금 '청부입법'의 유혹에 빠지게 한다. 각 정부 부처가 타 부처와의 충돌이나 과잉 규제 등 논란이 클 것으로 보이는 입법 사항에 대해 자신의 입맛에 맞게 조리, 그저 국회의원 이름만 빌려 발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청부입법 관행은 정보통신기술(ICT) 분야에도 상당한 것으로 추측된다. 2년 차에 접어든 21대 국회에서 벌써 8233건의 법률안이 제출됐고, 여기에 의원발의안이 7912건으로 역시 96%가 넘는 수준이다. 혹자는 제출이야 누가 하든 입법권이 있는 국회에서 잘 심사하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 국회 기능 정상화, 입법 과학화를 통해 해소할 수 있겠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우리나라 국회는 상임위원회에서 중요 사항이 거의 다 논의되고 법제사법위원회는 자구 심사, 본회의는 사실상 끝난 논의에 대한 확인에 각각 그친다. 입법 과정에서 상임위가 주도하는 구도는 법안에 대한 전문적 심사에 유리한 반면에 본회의 검토를 형식화하고 소관 부처와는 사실상 동지적 관계로, 과잉 입법에 대응력이 취약한 한계가 있다.
의원이 청부발의한 입법에 대해 청부한 부처가 의견을 표명하는 구조에서 엄격한 심사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다부처가 관련되고 기술 의존성이 큰 ICT 분야의 특성상 부처 간 경쟁적 규제 선점 시도로 중복 규제가 양산되고, 불명확하고 과도한 하위규정 위임이 발생할 가능성이 짙다. 게임물 규제 역사에서 게임 이용 시간에 대한 부처 간 경쟁적 규제에도 청부입법의 그늘이 존재했다. 최근 확률형 아이템과 게임광고 규제로 논란을 크게 빚은 '게임산업법'과 부처 간 낯 뜨거운 규제 경쟁을 벌이는 '온라인 플랫폼 규제법안'에서도 마찬가지다.
규제정보포털에 따르면 21대 국회에서 의원발의안 중 규제의 신설·강화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법안이 무려 1041건에 달한다. 다양한 이해 당사자나 타 부처의 의견이 조율되지 못한 채 최소한의 합법성 기준도 충족시키지 못한 졸속입법이 우려된다. 다수의 의원발의안이 제출된 이른바 'n번방 방지법'(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에서 형사 처벌의 대상인 기술적·관리적 조치 의무에 대해 사실상 대통령령에 백지위임했는데 이는 입법 품질에 실패한 대표적 사례다.
입법 부실을 가중시키는 무분별한 청부입법의 구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의지가 중요하다. 정상적인 입안 절차를 무시하고 부처별로 의원실 문을 두드리며 읍소하는 정부 관행에 대해 총리가 강력하게 경고하고 불이익을 줘야 한다.
규제는 결국 집행에서 그 선악이 드러난다. 정부는 논란이 많은 규제일수록 정부 입안 절차를 통해 다양한 문제를 사전 점검하고 숙고하는 법 집행자의 품격을 지녀야 한다. 정부가 그 이름도 민망한 '청부입법'의 뒤에 숨는 비겁한 관행을 언제까지 두고 볼 것인가.
김도승 목포대 법학과 교수 kdoseu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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