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장 벤처기업의 복수의결권 도입이 기업의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에 역행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기업 지배구조에서 중요하게 고려되는 주주권과 평등권에 복수의결권이 반할 수 있다는 것이다.
23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글로벌 ESG 연구소 및 평가기관들이 복수의결권을 통한 통제력 강화 제도가 소액주주의 지분 가치를 침해할 여지가 높다고 보고 기업 지배구조 측면에서 복수의결권 제도 자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복수의결권은 창업주나 경영자가 자신이 보유한 지분율 이상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제도다. 우리 정부도 지난해부터 비상장 벤처기업의 복수의결권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1주 1의결권만 부여하는 현행 상법에서 비상장 벤처기업에 한해 예외를 인정하는 것이다. 기간도 정했다. 대규모 투자 유치로 창업주의 보유 지분이 30%를 밑도는 경우 최대 10년까지 복수의결권 주식을 발행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상장 이후 3년 유예기간을 뒀다. 중소벤처기업부는 복수의결권 허용을 담은 벤처투자법개정안의 올해 안 국회 통과를 목표로 한다.
그러나 ESG가 기업 경영에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면서 정부의 복수의결권 도입에 대한 정책 재점검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경영권 보호가 목적인 복수의결권이 자칫 소액 투자자의 권리·보호를 침해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최근 아시아기업지배구조협회(ACGA)에서 발간한 '2020년 기업지배구조 평가보고서'(CG Watch 2020)에서 우리나라의 기업지배구조가 종합 점수 52.9점으로 아시아·태평양 지역 12개국 가운데 9위를 차지했다.
1위는 호주, 2위는 홍콩, 싱가포르가 공동으로 이름을 올렸다. ACGA는 2년마다 아태 지역의 기업 지배구조 정책과 1200여개의 기업 현황을 토대로 나라별 순위를 매기고 있다.
우리나라는 2018년에 이어 지난해에도 9위를 기록하며 하위권에 머무르고 있다.
ACGA는 우리나라가 지난 2년 동안 상법 개정, 주주총회 활성화를 위한 제도 개선, 지배구조 공시 의무화, ESG 공시의무화 계획 발표 등을 통해 의미 있는 개혁이 추진되고 있다고 긍정 평가했다. 그러나 지배구조 공시 의무화 대상 범위와 내용, 소수 주주 보호장치, 사법 독립성 등과 관련해 좋지 않은 평가를 했다. 특히 우리나라의 복수의결권 도입 추진에 대해 기업의 지배구조 개혁을 후퇴시키는 '모순적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실제 선진국에서는 기업공개 이후 경영자와 외부 주주 사이의 갈등이 커지면서 투자자 이익이 감소하는 등 복수의결권 악용 사례가 발생했다. 이에 많은 기업이 복수의결권을 단일의결권으로 바꾸고 있다.
업계 전문가는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복수의결권 적용이 기업의 ESG 경영에 결과적으로 마이너스로 작용할 여지가 있다”면서 “특별한 상황이 있는 때에만 한정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적용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포함해 더욱 세밀한 정책 설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성현희기자 sunghh@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