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적으로 불편을 감내하던 요소를 시원하게 해결해준 서비스, 기존 시장의 고정관념을 깨고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도전장을 던진 비즈니스 모델, 대기업이 아니기에 틈새시장을 공략할 수 있는 기술. 세계 시장 변화를 주도하는 것은 더 이상 대기업이 아닌 스타트업이라고 말할 정도로 스타트업과 창업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스타트업으로 출발해 국내 시장에 소셜커머스라는 새로운 온라인 유통 트렌드를 이끈 쿠팡이 미국 뉴욕증시에 상장한 시가총액 100조원 규모 거대 유니콘으로 성장했다. 이제 차세대 유니콘이 될 흙 속의 진주를 찾아내고 이들과 함께 성장할 방법을 찾는 것은 비단 벤처캐피털(VC)뿐만 아니라 모든 기업의 화두가 됐다.
하나금융그룹은 타 금융그룹 대비 비교적 늦게 전문 벤처캐피털 계열사인 하나벤처스를 2018년 10월 설립했다. 하나금융그룹 계열이지만 금융이나 핀테크 분야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산업에 걸쳐 유니콘 기업을 발굴하는 신기술사업금융회사(신기술금융사)로 경영독립성을 갖고 독립적으로 벤처펀드 운용과 전업 투자를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하나벤처스 초대 대표이사로서 2018년 10월 출범부터 지금까지 회사를 이끌고 있는 김동환 대표를 만나 회사 성장 스토리와 앞으로의 목표를 들어봤다.
대담=길재식 경제금융증권부장
-오는 10월 설립 3주년을 맞는다. 짧은 기간동안 시장에서 VC로서 입지를 탄탄히 다진 것 같다.
▲흔히들 보수적인 금융그룹 계열사의 VC여서 모기업으로부터 경영독립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지, 벤처투자 철학을 고수하며 투자할 수 있는지에 대해 우려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벤처스도 출범 당시 같은 시선을 받았다.
하나벤처스는 금융그룹에서 출범한 VC치고는 후발주자다. 3년이 채 안 됐으니 아직 업력이 짧다. 하지만 후발주자이기에 여러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어서 강점이 많다.
우선 설립할 때부터 대표이사인 나를 포함해 경영진과 투자인력을 모두 외부 VC 전문가로 구성했다. 벤처캐피털 전문성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모태펀드, 성장금융, 산업은행 등에 출자를 제안해 위탁운용사로 선정되는 성과도 거뒀다. 이제 하나벤처스가 독립적인 벤처펀드 운용과 투자를 전업으로 하는 VC인 점을 시장에 분명하게 각인시켰다고 본다.
하나벤처스 자본금은 1000억원으로 대형 VC로 도약했다. 이는 그동안 국내 VC 업계에 만연했던 단기 수익성 위주 투자를 벗어날 수 있는 기반을 갖추는 발판이 됐다. 다양한 벤처투자 전략을 구사할 수 있고 장기 안목으로 투자를 시도할 수 있는 경쟁력으로 작용했다. 경영은 물론 투자 독립성을 확보해 VC 본연의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갖췄다.
하나벤처스는 국내 VC 업계 처음으로 1호 펀드를 1000억원 규모 대형펀드로 결성했다. 3년차인 올 가을까지 5300억원 규모 운용자산(AUM)과 130여개 투자 포트폴리오를 확보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국내 VC 역사상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회사라고 자부한다. 향후 2년 안에 1조원 규모 펀드를 운용해 이제는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한 유니콘 스타트업을 육성하는 것이 목표다.
-그동안 추진한 투자 중 괄목할 성과를 거둔 사례를 꼽는다면.
▲회사 설립 후 2년 6개월 동안 10개 펀드를 결성해 운용펀드 규모를 2300억원까지 늘렸다. 총 96건 딜에 1585억원을 투자했다.
올해는 미국 웹툰 플랫폼 운영사 '타파스 미디어', 패션·화장품 전문 전자상거래 기업 '피피비 스튜디오스', 게임 개발사 '로얄크로우' 등에서 투자금을 회수하는 성과를 거뒀다. 기존 대형 VC 못지 않게 활약했다고 생각한다.
올 상반기에는 모태펀드 1차 정시 출자사업에서 '스마트대한민국 비대면 일반' 분야와 '버팀목펀드' 분야 위탁운용사(GP)로 선정됐다. 최근에는 산업은행 정책형 뉴딜펀드 2021년 수시 위탁운용사로 선정됐다.
모태펀드 2개 조합과 산업은행 뉴딜펀드를 결성하면 올 10월까지 운용펀드 규모는 약 5300억원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한다. 증가한 펀드 규모에 맞춰 실력과 열정을 겸비한 투자심사역을 더 많이 확보하려고 한다.
-하나벤처스만의 강점을 꼽는다면.
▲현재 벤처투자 시장은 VC뿐만 아니라 증권사, 프라이빗에쿼티(PE), 자산운용사, 은행 등 모든 금융사가 뛰어들었다. 경쟁이 상당히 치열하다. 10년 전인 2010년에 연간 벤처투자 총액이 처음으로 1조원을 넘어섰는데 2020년 총 벤처투자 규모는 6조5000억원을 형성했다. 10년 만에 6배가 성장한 셈이다. 올해는 10조원 규모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벤처투자자가 많아지고 자금이 증가하니 경쟁이 한층 뜨거워졌다.
수많은 해외 투자 성공사례를 분석해보면 벤처투자 성공 요인은 VC의 지속적인 후속 투자와 투자기업의 가치 증대를 위한 노력으로 귀결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꽤 오랫동안 국내에서는 초기, 중기, 후기, 프리-IPO로 나뉘어져 분야별 전문화된 VC가 많았다. 그러나 주요 미국 VC들은 이 모든 것을 한 회사 내에서 통합해 팔로온 투자(후속투자)를 했다. 이들은 지난 10년간 국내 모든 VC가 얻은 투자수익보다 더 많은 이익을 냈다.
하나벤처스는 초기, 중기, 후기, 프리-IPO를 모두 포괄하는 조직, 인력, 조합을 만들어 후속투자에 집중하고 있다. 실제로 전체 포트폴리오의 40%가 넘는 회사에 후속투자를 집행하고 있다. 중기 이전 단계 투자의 경우 후속투자까지 고려해 미리 투자재원을 마련한다.
의식주컴퍼니, 리디, 패스트파이브, 설로인, 파이안바이오테크놀로지, 커먼컴퓨터, 메디스트림, 힌스 등이 후속투자를 유치한 사례다. 하나벤처스는 출범한 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상당수 기업에 후속투자를 했다. 빅픽처인터랙티브라는 e스포츠 회사에 대해서는 총 3번 투자했다.
전에는 VC가 후속투자를 잘 하지 않는 문화가 있었다. 궤도에 오르지 못하는 회사에 대해서는 후속투자를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처음 생각대로 잘 사업을 운용하는 회사, 코로나19 같은 환경 영향 때문에 계획보다 성과는 덜하지만 기업가 역량이 괜찮아서 앞으로의 성장을 기대할 만한 곳에 대해서는 후속투자를 집행한다.
초기 창업기업에 대한 투자도 중요하다. VC가 초기창업 기업에 투자하지 않는 것은 기술기업이 연구개발(R&D)에 투자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창업 3년 미만 기업 대상으로 1년에 두 번씩 창업경진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기업당 10억원 이하 규모를 투자하고 있다. 이들 기업도 향후 성장에 따라 후속투자 대상이 된다.
기업이 성장하면서 필요한 자금 수요를 해결하는데 반드시 금융서비스가 필요하다. 낮은 금리로 대출받아 자금을 조달해야 할 때, 전환사채(CB) 등 금융상품을 발행할 때, 금융사의 페인 포인트(Pain Point)를 해결해줄 수 있는 유망한 초기기업과의 협력이 필요할 때 등 다양한 경우에서 하나벤처스가 기 투자한 기업과 금융 계열사를 연계해주는 역할을 한다.
또 하나벤처스는 하나금융지주 자회사여서 은행, 카드, 증권, 보험, 캐피털 등의 계열사를 활용할 수 있다. 다른 VC보다 시장 커버리지가 넓은 것이 강점이다. 여러 기업을 접하면서 성장 가능성이 있는 곳과 빠르게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은 상당히 유리하다.
-최근 어떤 산업에 관심이 있는지 궁금하다.
▲D·N·A(데이터·네트워크·AI)와 콘텐츠, 커머스, 메타버스, 전기차, 반도체, 배터리는 한국이 높은 기술 경쟁력을 가진 분야다. 디지털 전환이 빨라졌고 경제 전반에 걸쳐 비대면화 추세도 가속화했다. 기반 기술인 데이터, 네트워크, 인공지능(AI) 등 디지털 기반 경제혁신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는 분야가 더 중요해질 것으로 보고 주요 투자 분야로 삼고 있다.
한국 콘텐츠의 세계화에도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음악, 영상, 웹툰, 웹소설 등 한국 콘텐츠가 세계에 진출해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생각해보면 1980~1990년대에는 음악을 들을 때 상당수가 국내 가요보다 팝을 많이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대다수가 거의 국내 음악을 소비한다. 미국을 제외하고 우리나라만큼 자국의 음악·영상 콘텐츠를 소비하는 곳이 없다. 이제는 스크린쿼터제가 필요 없을 정도로 한국영화를 많이 본다.
콘텐츠는 자주 사용하고 플랫폼에 오래 머무르게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정보기술(IT) 서비스가 잘 되려면 기술도 중요하지만 이런 콘텐츠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제조업이 국가의 미래였다면 이제는 IT, 디지털, 헬스케어가 국가 미래 성장을 이끌 분야로 보고 있다. 다행인 것은 우리나라가 과거와 미래의 산업 포트폴리오가 균형있게 잘 갖춰졌다는 점이다. 세계적으로 이렇게 균형 있게 갖춘 곳은 미국, 한국, 중국 정도로 보인다. 일본과 대다수 유럽국가도 미래산업 준비 균형이 덜 돼있다.
하지만 미래산업 포트폴리오를 잘 갖췄다고 해서 양극화 문제를 해결해줄 수는 없다. 저성장 기조에서 상대적으로 한국이 가장 선방한 것을 고려하면 결국 한국의 성장성을 가장 손꼽을만 하다.
-한국 벤처투자가 활성화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지난해 국내 벤처투자 규모는 6조원대로 올라섰다. 올해도 역대 최대 투자실적이 이어지고 있다. 코로나19 여파로 비대면 분야 기업에 대한 투자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올 1분기 기준으로 보면 3년 이하 초기 기업에 대한 투자 비중은 조금 감소했다. 대신 후속투자 비중이 상승하는 추세다. 성장잠재력이 높은 스타트업이 많이 등장했고 VC들이 이런 곳을 선별해 집중 투자해서 기업가치를 빠르게 높이려는 경향이 강해졌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국내 VC 시장은 과거와 비교해보면 양적으로 상당히 활성화됐다. 이제는 질적인 측면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고평가 논란을 빚은 만년적자 유니콘 기업에 대한 투자, 검증이 충분하지 않은 기술기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 스팩이나 특례상장을 노린 비상장주식 투자 경쟁 양상을 보면 과거 닷컴버블과 비슷해 우려된다. 현재 유동성 쏠림 현상 속에서 투자 방향성과 속도가 맞는지 VC가 스스로 검증하고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도 다행히 과거보다는 버블의 질이 달라졌다. 과거 버블은 갑자기 뻥 터지는 양상이었다면 지금의 버블은 좀 더 건강해져서 성격이 다르다.
지금보다 더 많은 민간자본 유입도 필요하다. 민간자본이 늘었지만 증가치 대부분은 1년 6개월 안에 투자금을 회수하기 원하는 단기 프로젝트 자금이다. 우수 기업을 발굴해 장기간 지원하려면 벤처의 블라인드펀드처럼 8년은 견딜 수 있는 양질의 장기투자금이 필요하다. 현재 블라인드펀드로 오는 민간자금은 거의 없다.
10년 전 한국의 부자순위를 보면 20위권에 기업 상속자가 대부분이었고 창업자는 2명 정도였다. 지금은 창업자가 당시보다 많이 늘었다. 10년 사이 많은 변화가 있었다.
부호 순위 상위 10위권 인물들은 갑자기 창업해서 성과를 낸 것이 아니다. 1990년대, 2000년대 초반에 창업해서 10여년이 지나 순위에 진입했다. 벤처붐 20여년이 지나니 변화가 나타난 것이다.
이처럼 부호 순위가 변화하는데 20여년이 걸린 것처럼 질 좋은 벤처투자가 일어나려면 8년을 견딜 수 있는 질 좋은 민간자금 유입이 꼭 필요하다.
◇김동환 하나벤처스 대표는
김동환 대표는 연세대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하고 미국 시카코대에서 MBA를 마쳤다. 대학교 4학년 재학 시절 당시 친구들과 인터넷서비스 기업을 창업해 2년가량 운영했다.
이후 증권업에 몸 담았다. 당시 굿모닝증권(현 신한금융투자)과 골드만삭스에서 IB업무와 고유계정운용 업무를 수행했다. 자본시장에서 쌓은 경험을 토대로 소프트뱅크벤처스아시아에서 벤처투자를 시작했고 이후 하나금융그룹에서 하나벤처스를 설립해 초대 대표이사로 선임됐다.
정리=
배옥진기자 withok@etnews.com
사진=김민수기자 mski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