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원장은 ETRI를 비롯한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이 '틀을 깨야 한다'고 강조했다. 단순히 연구만 수행하는 조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쓰이지 않는 기술은 의미가 없다는 설명이다. 기술사업화를 통해 기술이 성장 무기로 쓰일 때 기술이 가치와 파급력을 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출연연 기술사업화 전진기지론'이다. 그리고 해당 기술을 제일 잘 아는 연구자가 직접 기업활동에 참여할 때 이를 배가할 수 있다고 힘줘 말했다. ETRI는 이를 위한 기반을 오래 전부터 착실히 마련해 온 곳이다. 최근에는 투자자본수익률(ROI) 10%도 달성했다고 한다. 김 원장의 말과 같이 기존 틀을 깨는 새로운 시도도 거듭하고 있다. 김 원장을 만나 현재 상황과 앞으로 계획, 향후 비전 등을 들어봤다.
-ETRI를 비롯한 출연연 성과가 예전만 못하다는 비판이 나오는데, 기술사업화가 이런 상황을 타개할 기반이 될 수 있을지.
▲ETRI의 경우 CDMA 기술 개발로만 1997년부터 2008년까지 11년간 3182억원 기술료를 창출했다. 정말 눈부신 시기였다. 지금도 LTE와 WiFi 글로벌 라이선스로 2년간 852억원 특허기술료를 창출하는 등 통신 관련 성과가 이어지지만, 사실 과제중심예산제도(PBS) 도입 등에 따른 과제 소형화나 단기성 상용화 과제 확대로 대형기술사업화 성과가 예전만 못한 측면이 있다.
대안은 보유 기술 사업화에 있다. 출자지분에 참여하고 성장을 지원해 대형 기업을 창출하고 기술 파급력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전환 중이다. 기업공개(IPO)시 수익도 얻을 수 있다. 실제 2019년부터 3년간 152억원 출자수익을 창출키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유니콘 기업' 창출을 큰 목표로 잡는 것으로 안다.
▲유니콘 기업은 기업가치가 1조원(10억달러)이 넘는, 성장가능성이 매우 높은 비상장 스타트업을 뜻한다. 기술사업화의 꽃이다. 당연히 유니콘 기업 배출을 목표로 잡을 수밖에 없다. 기존 우리나라에는 대부분 서비스 플랫폼 기반 유니콘 기업이 있는데, ETRI 기술력을 살려 딥테크 기반으로 기업을 만들어 일자리 창출을 비롯한 파급효과를 내려고 한다.
사실 이런 계획은 15년 전부터 구상했다. 당시 ETRI를 이끌던 최문기 원장(초대 미래창조과학부 장관)과 기술사업화 강화에 노력을 기울였고, '1조 매출 올리는 기업을 10개 만들어 보자'고 제안했다. 요즘 말하는 유니콘 기업을 만들자는 제안이었다. 최 전 장관도 '20개는 만들어야지 않겠나' 할 정도로 덩달아 고무됐던 기억이 있다. 그 일환으로 내가 기획본부장 시절에 출연연 최초 기술지주사 '에트리홀딩스'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에트리홀딩스는 현재 ETRI 기술사업화 지원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내가 원장이 된 후에는 더욱 유니콘 기업 배출에 힘쓰고 있다. 이미 원내 중소기업사업화본부, 자체 기술지주회사인 에트리홀딩스를 연계한 유니콘 프로젝트를 2020년부터 운영 중이다. 에트리홀딩스에서 신한은행과 함께 유니콘프로젝트 투자를 위한 전용 펀드를 결성했다. 발굴해낸 기업에 이 전용 펀드로 투자해 내년부터는 유니콘 전단계(Pre-Unicon)급 연구소기업을 설립하고 집중 육성할 예정이다.
원내 중소기업사업화본부나 에트리홀딩스에 늘 강조하는 것이 '투자에 실패해도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투자가 아니라 창업과 육성에 목표를 둬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사람들이 모체인 ETRI를 몰라도 배출 유니콘 기업은 알도록 하는 것이다. '네이버' 예가 있다. 네이버는 사실 삼성SDS 사내 벤처로 시작했는데, 지금에 이르러 이를 아는 사람은 많이 없다. 그만큼 네이버 위상이 커진 것이다. 우리도 ETRI가 가려질 만큼 위상이 큰 유니콘 기업을 만들고자 한다.
추가로 대형기술창업, 사업화 성과 창출을 추진하고 있다. 인공지능(AI) 에지 플랫폼 기반 사업화 모델을 기획해 지난 1월 '인투와이즈'를 설립, 연구소 기업 등록을 마쳤다. 곧 스마트 기술로 가축 감염병을 관리하는 플랫폼 기업 '파민'도 설립 예정이다.
-유독 기술사업화를 강조하는 이유가 있을지.
▲오랜 경험과 믿음에 따른 것이다. 내가 사실 연구원으로 재직하면서 기술이전만 183건을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보니, 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창업과 연계되지 않으면 기술이 사장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우쳤다. 그래서 스스로 '테스트마이다스'라는 기업을 만들기도 했고 후배 직원의 '슈어소프트테크' 창업을 독려하기도 했다. 슈어소프트테크는 내가 창업계획서를 써주고, 투자도 받아주는 등 노력을 했을 정도다. 결과적으로 다 잘 풀렸다.
-출연연 구성원은 '수동적'이라는 인상을 주는데, 적극적으로 임하는지. ETRI 인력이 누출된다는 우려도 있다.
▲지금도 가능한 직원 모두에게 창업하라고 말한다. 심지어는 연구실 전체를 내보낸 경우도 있다. 출연연 연구원들이 안주하려는 것이 사실이다. 기술료가 그만큼 달콤하다. 잘만 되면 책임연구자에게 '벤츠' 1대가 나온다. 모험심과 전의가 쉽게 꺾인다. 그래도 기술력이 뒷받침된다면 창업해야 한다. 창업이 훨씬 큰 파급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물론 내부에서도 인력 부문에서 불만이 없지 않다. 연구인력이 누출되면 해당 분야 연구는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나는 '안 하면 된다'고 답한다. ETRI 정관은 '산업 발전에 이바지 한다'고 기관 역할이 규정돼 있다. ETRI 연구원이 창업해서 대박을 터뜨린다면, 그만한 산업 이바지가 없다. 애먼 후배를 찬 바람 부는 곳으로 내모는 것은 절대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나도 창업을 했고, 심지어 내 아들도 창업을 했다.
-현재 ETRI는 연구원 창업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차별적인 기술창업 독려 및 지원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다고 자부한다. 다행히 지난 10여년간 성공사례로 창업에 대한 내부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여기에 더해 매년 '창업아이디어 공모전'을 벌이고 있고, 발굴한 아이디어는 비즈니스 모델 구체화와 고도화 과정을 연계해 지원하고 있다. 창업도전 인식을 전환하는 '창업 아카데미', ETRI 연구자가 개발 기술로 창업할 경우 기술료를 면제·감면하는 제도도 도입했다.
기획창업도 적극 지원하고 있다. 대형·융합 연구성과를 활용해 팀 단위 기술창업을 기획하거나 외부 지원사업을 연계해 지원하는 체계를 갖췄다. 애초에 창업을 염두에 두고 연구개발(R&D)을 시작하고 지원하는 '창업일체형 R&D'도 시작했다. 올해 3건부터 시작이다.
특히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 '창업목표형 연구직' 채용이다. 이들은 원내 어느 연구실이든 관심 있는 곳으로 가서 배우고 일하면서 창업을 준비하라고 했다. 현재 총 8명을 채용했는데, 일단 20명 정도를 생각하고 있다. 이들은 ETRI라는 호수에 풀어놓은 '메기'다. 이들이 온 연구실을 비집고 다니면서 '창업할 것 없나요'하고 다니면서 기관 전체에 역동성과 도전성을 심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창업겸직제도도 준비 중이다. 예를 들어 월·화·수요일은 원내 근무하고, 목·금요일은 기업에서 일하는 식으로 외부 활동을 장려하는 것이다. 사실 도입이 늦었다고 생각한다. 대학 교수는 이미 겸직제도가 활성화돼 있는데, 우리라고 못 할 일이 아니다.
-ETRI 기술을 활용, 이미 3개 기업이 IPO에 성공했다. 이것에는 어떤 기관 역량이 작용했을지.
▲ETRI 연구소기업인 수젠텍, 신테카바이오, 진시스템 3곳이 IPO에 성공했다. 우리 기술과 특허, 전주기 지원체계 우수성이 모두 빛을 발한 결과다. 앞서 말한 지원제도를 포함해 오랜기간 아주 견고하게 창업지원체계를 구성했다. 창업과 성장 전 과정을 지원하는 'ETRI 챌린지·스타트·스케일업(CSS) 플랫폼'이다. 이것이 제 역할을 해 연구소기업 IPO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52호 연구소기업 '마인즈랩'이 지난 6월부터 상장예비 심사를 받고 있다. 마인즈랩은 ETRI 소셜 빅데이터, 음성인식 기술을 출자받았다. 내달 이후에는 코스닥 상장을 기대하고 있다. 기술특례상장으로 진행 중인데, 이미 공인전문평가기관으로부터 AA·A 등급을 받았다. 전망이 아주 밝다. 상장시 100억원 이상 출자수익이 나올 것으로 보고 있다.
-ETRI 기술사업화, 기업 지원에는 융합기술연구생산센터(CCC)와 같은 기업친화공간 역할이 큰 것으로 안다.
▲사실 ETRI는 기업이나 파트너들 출입이 쉽지 않은 국가보안시설이다. 이 때문에 본원 옆 CCC에 출입을 위한 기업친화적 총체적 공간을 마련하고 기술사업화전문조직을 배치했다. 본래 중소기업사업화본부가 본원 행정동에 있었는데, 기업관계자들이 본원에 출입해 상담을 받기까지 과정이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이들은 기업과 가까워야 한다. 그래서 '사업화본부가 행정동에 있을 이유가 뭐냐'며 다 본원 밖으로 이전시켰다. 덕분에 외부 기업 손님이 10배 가까이 늘었다. CCC도 전에는 구청 같은 관공서 느낌이 났는데, 지금은 조금 벤처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나중에는 맥주 같은 주류도 팔면서 창업기업인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정보교류하는 자유로운 창업공간으로 만들고 싶다.
이와 별도로 대전시와 함께 혁신 기술창업 혁신 클러스터인 '마중물플라자'도 따로 조성할 계획이다. 내년 착공 예정이다.
-기술사업화 근간인 특허기술 확보는 어떻게 확대·발전시키고 있는지.
▲국가지능화에 이바지하겠다고 천명한만큼 인공지능(AI) 분야에 특화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ETRI는 이미 2019년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에서 전 세계 대학·공공연 중에서 인공지능(AI) 분야 특허출원 2위 기관으로 인정받은 것을 비롯해 수많은 곳에서 특허 역량을 인정받고 있다. 여기에 더해 지난 5월에는 AI에 특화된 특허전략을 수립해 추진하는 등 미래 대비도 철저하게 하고 있다. AI 특허를 집중 관리해 성과를 특허 포트폴리오로 권리화 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AI 관련 유망 스타트업과도 동반 성장을 위해 협력중이다.
물론 다른 분야도 신경 쓴다. 6G, 5세대 비디오 부호화 국제표준(VVC) 영역도 미래유망 표준특허 분야로 설정해 핵심 표준특허 확보를 추진하고 있다.
-창의원천 기술 개발에도 열심인 것으로 안다.
▲돌이켜 보면 지금 기술사업화 성과는 과거 창의원천 연구에서 비롯됐다. 김흥남 전 원장(2009년 취임)이 뿌린 씨앗이 10년 인고 세월을 거쳐 결실을 맺은 것이다. 나 역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술사업화에는 기반이 필요하고 그 기반이 창의원천 기술이다. 내가 취임 당시 창의원천 연구 비중이 26% 정도였는데, 이를 5년 내 50%까지 끌어올리자고 했다. 부단히 노력 중이다. 10년 후에는 나를 비롯한 현재 ETRI 구성원 노력이 미래 세대에 더욱 윤택한 환경을 제공하고, 보다 창의적이고 국제적인 연구에 도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기 바란다. 내가 김흥남 전 원장 이름을 언급했듯이 10년 뒤 후배 원장이 내 이름을 이런 인터뷰 자리에서 언급해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대전=김영준기자 kyj85@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