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주어진 공간에 의해 커다란 영향을 받고 있으며 공간은 사람들이 특정 행위를 수행하도록 유도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공간으로 유도되는 행동은 간헐적이고 일회성 있는 행동(action)이나 활동(activity)이 아니라, 일정한 패턴을 띠고 지속적 양상을 갖는 행태(behavior)라는 점에서 그 영향력이 크다. 이러한 사실은 유럽 카페테리아와 우리 전통마을 사랑채만 비교하더라도 쉽게 확인 가능하다.
문화인류학자들은 유럽 각지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는 카페테리아를 르네상스와 산업혁명이 유럽 각지로 확장된 요인으로 설명한다. 1683년 당시 런던에만도 3000여개 카페테리아가 있었고 선술집의 수를 능가했다고 한다. 대로변이나 노천에 있는 카페는 신분과 직업을 달리하는 다양한 계층이 소통하는 공간이었다. 자유로운 교류 장소에서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매듭은 당연히 지적 관심사였다. 카페에서 담론은 집단지성을 이뤄 르네상스 이후에도 지속적 문예 부흥을 이끌어냈으며 여러 기술자와 공학자의 지식을 융합시켜 산업혁명을 유도했다.
우리 역사에서도 담론 문화를 꽃피웠던 공간이 있었다. 전통마을이나 한옥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랑채가 바로 그것이다. 사랑채로 형성된 담론 문화는 유럽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형태였다. 사랑채를 이용하는 방식이 서양 카페테리아와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사랑채는 주인이 거처하며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으로 손님들과 시작(詩作), 담론, 주연(酒宴)을 나누는 공간이었다. 노천에 있어 외부인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카페와 달리 가정집 가장 안쪽에 있던 사랑채는 철저히 주인의 통제 아래 참석자가 결정됐다. 조선의 가부장적 체제 속에서 사대부 사랑은 주로 문벌과 학통이 비슷한, 다시 말해 자신과 비슷한 신분의 비슷한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만 단골로 출입하던 공간이었다. 사랑채에서 이뤄진 담론은 철저히 주인의 주된 관심사에 부합하는 인사들로 채워지기 일쑤였다.
최근에는 공간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효과에 대한 보다 세밀화된 연구들이 수행되고 있다. 독일 브레멘국제대 저명한 심리학자인 옌스 포이르서터는 창의력 관련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포이르서터는 실험 참여자들을 두 그룹으로 구분, 한쪽 그룹은 자유와 일탈을 떠올릴 수 있는 펑크족 이미지를 제시하고 다른 그룹에는 논리적이며 보수적 공학자의 이미지를 제시했다. 이후 두 그룹을 대상으로 창의력 테스트를 실시했는데 펑크족 이미지를 떠올렸던 사람들이 반대쪽 그룹 사람들보다 훨씬 높은 창의력을 보였다.
로버트 울리치 텍사스A&M대 교수는 꽃이나 식물이 있는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간 창의력에 차이가 있는지 확인하는 실험을 수행했다. 실험 결과 남성 직원은 꽃이나 식물이 있는 사무실에서 근무할 때 아이디어 제안 건수가 15% 증가했고 여성 직원은 꽃이나 식물이 곁에 있는 환경에서 근무할 때 보다 유연한 해결책을 내놓는 것으로 확인됐다.
일련의 연구 결과들은 사무실의 색감이나 사무실 벽에 걸어둔 이미지, 그림조차 직원들의 사고력과 업무 역량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디자인은 이처럼 직원 개개인 역량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조직 구성원 상호 간 관계에도 변화를 가져다준다.
많은 기업이 조직 창의력을 높이거나 구성원 간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또는 조직 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사무실 공간을 이에 부합하는 형태로 바꾸고 있다. 그 변화 중심에 있는 것이 회사의 공용 공간이다. 영국의 유명한 광고회사 HHCL은 서서 회의를 하거나 좁은 공간에 여러 사람이 일하도록 사무실을 설계하기도 했다.
구글 역시 사내 공용공간을 새로운 개념의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창의적 담론 문화와 원활한 직원 간 교류를 확장하기 위해 공용공간을 즐거운 곳으로 만들었다. 구글은 공용공간을 시각적 즐거움이 있는 공간이자 동료 직원들과 함께 즐겁게 대화하고 무료로 음료수도 마시고, 쉴 수 있는 기능이 모두 충족되는 편안한 장소로 구성했다. 애플, 구글, 3M 같은 기업들의 영광은 직원들의 혁신을 이끌어낼 수 있게끔 업무 공간과 환경까지 세심하게 고려하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4차 산업혁명으로 구현될 초연결사회는 집단지성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 어딘가에 아직도 사랑채가 남아 있어 새로운 혁신을 가로막고 있는 건 아닌지 되돌아볼 일이다.
박정호 명지대 특임교수 aijen@mj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