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 들어 부각되기 시작한 미국과 중국의 갈등은 산업, 경제, 외교, 무역, 보건의료 등 각 분야에서 심화됐다. 그 중심에는 반도체, 이동통신 등 디지털 시대 첨단기술 확보를 둘러싼 경쟁 관계가 포함돼 있다. 세계 각국은 첨단기술 확보에 사활을 걸고 노력하는 가운데 국가 간 경제 등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무기로 이를 활용 중이다. '디지털 대전환' 시대가 도래하고 '기술 패권 경쟁 시대'로 접어들면서 군사력, 경제력뿐만 아니라 첨단기술 확보 여부가 국가 운명을 좌우한다.
각국은 살아남기 위해 첨단기술 확보 정책을 마련하고 있다. 정치·경제적으로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미국과 중국도 국가 주도 기술개발과 시스템 정비를 추진 중이다. 미국 상원에서는 올해 6월, 첨단기술 개발을 위한 투자와 조직 정비를 담은 '미국혁신경쟁법안(USICA)'을 통과시켰다. 중국도 첨단기술 연구개발(R&D) 규모를 확대하고 국가적으로 전략 기술과 산업 분야를 지정해 육성 중이다.
특히 미국 법안을 살펴보면 인공지능(AI), 반도체, 양자컴퓨팅, 바이오, 에너지 등 첨단기술 개발에 약 1100억달러 예산을 투자한다. 또 국가과학재단(NSF)에 기술개발과 혁신을 위한 본부조직도 만들 예정이다. 아울러 해당 법안은 여야가 초당적으로 발의했고 기술개발뿐만 아니라 제조, 공급망 관리, 일자리 창출과도 연계시키는 등 첨단기술 개발과 국가 경쟁력 확보를 위해 범국가적으로 총력 대응하는 모습이다.
이제 첨단기술 개발은 국가와 국민이 모두가 참여하고 호흡을 같이해야 한다. 국가기술력 확보가 올바른 방향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정치가 앞장서고 과학기술계는 물론 모두가 참여해야 할 것이다. 또 디지털 시대 정책개발이나 재원 부담, 결과물 활용을 위해 전주기 통합 관리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필자는 첨단기술 개발을 위한 국가적, 사회적 역량을 총동원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본다.
첫 번째 이유로 기술 개발 파급력이 너무 크다는 사실이다. 첨단기술 개발 결과가 국가 경제는 물론 국가 자체의 흥망을 결정할 수도 있다. 국가 운명을 건 첨단기술 확보에 사회의 모든 역량을 투입하고 정부가 역량을 결집해 올바른 방향으로 조정하고 이끌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두 번째 이유는 디지털 기술 개발 특징을 들 수 있다. 첨단 디지털 기술은 정부와 산·학·연이 공조해 기술을 개발하고 세계적 흐름에 민첩하게 대처해야 한다. 따라서 과학기술정보통신부를 중심으로 '국가지능화 종합 연구기관'인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등 연구기관, 통신사업자 및 플랫폼 기업, 대학들이 힘을 합쳐 기술을 개발하고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를 가지고 패권 경쟁에 대응해야 한다. 지난 2년 동안 소·부·장 문제를 해결해 나간 사례는 좋은 본보기다.
마지막으로 첨단기술을 중심으로 사회 각 분야가 유기적으로 연결돼 서로 영향을 주는 특징을 들 수 있다. 첨단기술은 R&D 영역을 벗어나 개인의 행복, 공동체 성숙, 그리고 공공의 혁신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제품 제조뿐만 아니라 공공 플랫폼의 개혁, 협회나 단체의 선진화, 그리고 인력 양성 및 교육 시스템 등 정비가 필요하다.
미국과 중국의 경제적, 외교적, 군사적 갈등은 꾸준히 고조돼 왔다. 단기간 내 관계가 해소될 것으로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시점에서 우리와 유럽 주요국 간 기술개발 협력 확대 방안도 좋은 예가 될 것이다. EU와 대한민국 사이 한 줄을 더 잇게 되면 미·중 사이에 외줄타기 위험도 반감될 것이다. 기술 패권 경쟁 시대에서 첨단기술 확보는 우리의 생존 과제다. 국가와 국민이 모두 합심해 총력 대응하는 시스템을 차근차근 만들어야 한다.
김명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원장 joonkim@etr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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