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촉(觸)나라와 만(蠻)나라는 서로 땅을 뺏으려고 치열하게 싸웠다. 죽은 이가 수만에 이르고, 도망하는 적을 쫓아가면 보름이 지나야 돌아오곤 했다. 장자 '칙양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촉과 만은 달팽이의 양쪽 뿔에 나눠서 사는 미생물의 나라다. 처절하고 절박한 싸움이다. 그러나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아귀다툼이다.
1977년에 우주탐사선 보이저호가 발사됐다. 2018년 말 태양계를 벗어나 광속으로 지구에서 하루가 걸리는 곳까지 나아갔다. 1990년 2월 보이저1호가 뒤를 돌아보며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거기에 보일 듯 말 듯 한 창백하고 푸른 점(Pale Blue Dot)이 있다. 지구다. 그 안에서 달팽이 뿔 위의 미생물처럼 중국과 미국이 싸우고, 여당과 야당이 싸우고, 가진 자와 그러지 못한 자가 싸운다. 그러나 인간 역사는 반복되듯 그렇게 흘러가고 지금은 데이터·인공지능(AI) 시대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하늘이 우리에게 준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려고 만들었다. 우리 스스로 존엄과 가치를 지키지 않으면 그 무엇이 대신 지켜줄 것인가. 데이터·AI 시대는 경제전쟁이고, 패하면 우리의 존엄과 생존이 위협받게 된다. 능력이 탁월해도 특정 기업이나 개인으론 감당하기 어렵다. 국민 모두 자신에게 맞는 역할을 해야 한다.
1597년 명량해전에선 숨은 주역이 있었다. 당시 해남지역 최전선 정찰 담당 군관은 임준영이었다. 그의 보고다. “왜적은 부녀와 아이를 과녁 삼아 훈련하고 백성을 죽였다. 왜선에 식량을 싣고 출전 준비를 마쳤다. 여기선 더 할 일이 없으니 복귀하겠다. 최전선에서 왜적과 싸우게 해 달라.” 의병도 나섰다. 어선을 모아 조선함대 뒤에 포진했다. 거센 물살이 쇳소리를 내며 하루에도 대여섯 번 흐름이 뒤집히는 명량이다. 조선함대는 거센 물살과 함께 왜적에 밀리는 순간 후방의 어선과 부딪쳐 깨어지니 퇴로가 없는 배수진이다. 의병 마하수는 왜선에 포위된 조선수군을 구하다 적탄에 맞아 죽었다. 네 명의 아들도 부친의 시신을 안고 울다가 왜적 속으로 뛰어들었다. 조응량은 후퇴하는 적을 쫓다가 아들과 함께 죽었다. 양응지도 낫과 괭이로 왜적과 싸우다 죽었다. 오극신은 아들과 함께 조선함대에 올라오는 왜적을 찾아 돌과 창으로 공격하다가 둘 다 죽었다. 정명설은 아들과 함께 조선 전함에 오르려는 왜적을 작살로 공격했다. 그러나 총탄에 맞고 죽었다. 선비 오익창은 군량과 무기를 모아 수군에 전달했다. 명량을 에워싼 언덕 위엔 백성들이 피란을 멈추고 수군의 승리를 응원했다.
당시 싸움이 창·칼과 대포를 앞세운 것이었다면 지금은 데이터·AI를 내세운 경제전이고 총력전이다. 오프라인에서 온라인, 메타버스까지 모든 곳이 전쟁터다. 1000만명 관객의 영화가 나오려면 탁월한 감독과 주연배우의 연기력만으론 부족하다. 투자처, 작가, 촬영, 의상, 소품, 스튜디오, 촬영장 섭외, 홍보, 배급 등 많은 사람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데이터·AI 산업도 마찬가지다. 멋진 AI 상품과 서비스가 나오기 위해선 기업, 대학의 기술·경제·경영 연구소에서 밤을 밝히며 일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기술, 하드웨어(HW), 소프트웨어(SW), 장비 및 콘텐츠 개발과 경영·마케팅 전략 수립에 몰두하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훌륭한 기술과 기업을 찾아 투자하는 벤처캐피털 등 금융기관이 있어야 한다. 정부, 국책연구소의 수많은 정책전문가도 필요하다. 그 속에 참여와 응원을 아끼지 않는 수많은 국민이 있다. 누구 하나 소홀히 해선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돌격 앞으로!'를 외치고 정작 본인은 뒤로 빠지는 사람은 없었으면 좋겠다.
데이터·AI 산업에 종사하고, 이들을 응원하는 사람은 모두 존경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다.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글을 써서 보인다는 것은 불이 난 목욕탕에서 뛰쳐나온 사람처럼 부끄럽고 무서운 일이다. AI법률사무소 칼럼을 읽어 준 애독자들께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국가지식재산위원) sangjik.lee@bk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