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박사, 전자공업을 육성하고 싶은데 날 좀 도와주시오.” 1967년 9월 10일. 박정희 대통령이 이날 오전 청와대 집무실에서 처음 만난 재미 과학자 김완희 박사에게 한 말이다. 박 대통령은 이후 과학입국과 전자산업 진흥을 위해 김 박사에게 무한 신뢰감을 보이며 계속 손을 내밀었다. 박 대통령은 다음 만남에서 귀국을 타진했다. “돌아오지 않겠소.”
박 대통령은 그다음 만남에서 동행을 제안했다. “이제는 나올 때가 되지 않았소. 나와 함께 일 좀 합시다.” 박 대통령의 이 같은 삼고초려(三顧草廬)에 김완희 박사는 마음을 돌렸다. 과학 불모지인 한국 전자산업의 꽃을 피우기 위해 귀국을 결심했다. 유비가 제갈량을 모시기 위해 초가를 세 번 찾았다는 뜻의 삼고초려와 딱 맞아떨어지는 상황이었다.
김 박사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미국 명문 컬럼비아대의 종신교수직을 버리고 귀국해서 이 땅에 전자산업의 초석을 놓았다. 김 박사를 한국 전자산업의 대부라고 부르는 배경이다. 이보다 앞서 박 대통령은 김 박사에게 상공부 장관 명의로 초청장을 보냈다. 그해 8월 말. 미국 컬럼비아대 김완희 교수실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주미 한국대사관의 장 모 일등서기관이었다.
“김 박사님, 상공부 장관이 박사님께 초청장을 보내왔습니다. 공업 육성 방안에 관해 박사님께 자문하고 싶다고 합니다. 초청장은 상공부에서 보냈지만 사실은 대통령께서 김 박사를 만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무슨 일이기에 대통령께서 나를 초청한다는 겁니까?” 이와 관련한 당시 상공부 관계자의 증언. “상공부는 1966년 12월 5일 '전자공업육성 5개년 계획'을 마련해 발표했습니다. 전자공업을 수출 전략산업으로 중점 육성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1967년 1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 기자회견에서 '공업입국(工業立國) 전면 작전을 전개하겠다'면서 '전자공업 개발에도 힘쓸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후 별 진전이 없었어요. 전자공업 진흥을 위한 구체적인 정책을 마련하기 위해 전자와 컴퓨터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김완희 박사를 정부가 초청한 것입니다. 모두 청와대의 뜻이었습니다. 비용도 청와대가 부담했습니다.”
같은 해 9월 4일. 서울에 도착한 김 박사는 곧바로 박충훈 상공부 장관을 만났다. 박 장관이 초청 이유를 설명했다. “우리도 일본처럼 전자공업을 빨리 육성할 수 있는 정책을 수립하고자 합니다. 김 박사께서 많이 도와주십시오. 이는 대통령의 뜻입니다. 국내 연구소와 생산업체부터 둘러보십시오.” 이튿날부터 김 박사는 이철승 상공부 차관과 함께 금성사, 대한전선, 전파연구소(현 국립전파연구원), 한국전력, 중앙공업연구소(현 국가기술표준원) 등을 4일간 방문하고 보고서를 작성했다.
보고서는 김 박사의 메모 내용을 토대로 윤정우 당시 상공부 전기공업과 계장과 상공부·전자협동조합 직원 등이 함께 브리핑 차트를 만들었다. 윤정우 전 전자정보인클럽회장의 증언. “김 박사는 당시 서울 중구 남산 타워호텔에 묵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호텔에 방 하나를 얻어 그곳에서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당시 전지 4분의 1 크기로 브리핑 차트를 만들었습니다.”
보고서 작업이 끝난 9월 10일. 박정희 대통령은 이날 오전 10시 30분 청와대 집무실에서 김완희 박사를 처음 만났다. 김 박사는 브리핑에서 전자산업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그때까지 국내에 전자산업이란 말은 없었다. 정부는 일본식 용어인 '전기기계공업'이나 '전자공업'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브리핑 자리에는 박충훈 상공부 장관과 신범식 청와대 대변인, 한준석 경제비서관 등이 배석했다.
김 박사는 전자공업 정의부터 시작해 △전자공업의 특징 △전자공업 발전 단계 △한국 전자공업 현황 △한국 전자공업 당면 과제 △외국 기술과 제품 동향 △세계시장 분포 △미국과 일본의 전자공업 육성책을 2시간여 동안 소개했다. 김 박사는 전자공업 진흥을 위해 △전자공업진흥법 제정 △기술자 양성 △부품 국산화와 산업 계열화 △전자산업진흥원 설립 등을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박 대통령은 귀와 마음을 열고 김 박사의 말을 경청했다.
김완희 박사의 회고록 증언. “박 대통령은 보고가 끝난 12시 30분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잠시도 차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대학에서도 박 대통령만큼 집중해서 듣는 학생을 보지 못했다.”(두 개의 해를 품에 안고)
박 대통령은 보고가 끝나자 김 박사와 오찬을 했다. 박 대통령의 식단은 검소했다. 고기류로는 갈비찜이 유일했다. 갈비찜도 김 박사를 위해 준비한 특식이었다. 오찬이 끝나고 서재로 자리를 옮긴 박 대통령은 선반 위에 있던 트랜지스터를 꺼냈다. “이게 한 개에 20~30달러 한다면서요. 손가방 하나면 몇 만달러라고 합디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도 면직물밖에 수출하지 못합니다. 철도 화물차로 날라도 몇 십만달러 안 됩니다. 내가 김 박사를 보자고 한 이유입니다.”
박 대통령이 전자 분야 재미 과학자를 물색할 때 한준석 비서관과 추인석 비서관 등이 최형섭 한국과학기술연구소장과 상의해서 김완희 박사를 추천했다. 이들은 전자공업 육성책을 수립할 적임자로 세계적 학자인 김 박사를 천거했다. “김 박사, 우리도 전자공업을 육성하고 싶은데 좀 도와주시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알겠습니다. 제가 육성책에 관한 보고서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혼자는 어렵습니다. 미국에 돌아가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비용은 얼마나 듭니까?” “대충 20만달러인데 우선 10만달러가 필요합니다.”
당시 빈국이던 한국에서 이 돈은 거금이었다. 미국에 돌아오니 이미 10만달러가 와 있었다. 김 박사는 미국 상무부 차관을 지낸 미국 시장조사 컨설팅회사의 제이스 회장을 만나 전자공업 육성책과 관련한 선진국 사례와 자료조사를 맡겼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는 전자공업과 관련한 국내 실태 조사를 의뢰했다. 연구소는 1968년 1월 29일부터 2월 15일까지 국내 실태를 조사했다.
김 박사는 한국형 전자공업 육성을 목표로 선진국 정책과 성공사례를 비교 분석했다. 대강의 밑그림이 나온 건 1968년 1월. 당시 보고서 임시 목차는 △전자공업 개요(전자공업 정의와 제품, 전자공업 세계시장 전망, 전자공업 적합성) △전자공업센터 필요성과 운영방안(센터 필요성, 센터 주업무, 운영 방안) △사업 분야별 목표 계획 등으로 정했다. 이를 토대로 세부 조사를 진행했다.
1968년 3월 7일 김 박사는 중간보고를 위해 일시 귀국해 9일간 머물렀다. 이 기간에 박 대통령을 세 번 만났다. 그 가운데 두 번은 독대했다. 이때 김 박사는 박 대통령의 전자산업 육성에 대한 열정과 강력한 의지를 거듭 확인했다. 김 박사가 미국에서 보고서 작성에 여념이 없던 4월 27일 한국 총영사관에서 전화가 왔다. “김 박사님, 본국에서 대통령 친서가 왔습니다.” “친서라니요?”
2시간여 지나 대통령 친서가 도착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외교행랑으로 보낸 편지였다. 테이프로 붙인 봉투를 뜯으니 누런색 봉투가 나왔다. 봉투와 편지지가 너무 초라해서 이것이 대통령이 보낸 서신인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봉투 앞에 김완희 박사 친피(親被), 뒷면에는 박정희 배(拜)라고 적혀 있었다. 박 대통령이 김 박사에게 보낸 첫 번째 친필 편지였다. 박 대통령과 김 박사는 이후 13년간 과학입국과 전자산업을 주제로 편지 130여통을 주고받았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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