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톡]혁신플랫폼과 적기법

[ET톡]혁신플랫폼과 적기법

마차가 붉은 깃발을 꽂고 달리면 자동차는 그 뒤를 따라가야 한다. 최고 속도는 시속 6.4㎞, 도심에서는 3.2㎞로 제한된다. 약 30년간 영국에서 시행된 '적기법'은 마차 사업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제정됐다. 영국은 가장 먼저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었지만 독일과 미국에 뒤처졌다. 적기법은 시대착오적 규제의 대표 사례다.

혁신 플랫폼이 때 아닌 적기법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리걸테크·메디컬뷰티·퍼스널모빌리티(PM) 플랫폼 등 적기법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글로벌 시장으로의 도약에도 아까운 골든타임에 낡은 규제의 틀 안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리걸테크, 세무 플랫폼, 메디컬뷰티 플랫폼 등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규제로 성장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규제가 취지를 막론하고 혁신 서비스로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변호사법은 부당한 권력에 항거할 수 있는 '안전장치' 취지로 제정됐다. 협회가 규정을 정하고 집행할 권리를 보장받음으로써 외압으로부터 공공성과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무사법은 세무 사건이 거래될 가능성을 막기 위해, 의료광고법은 불법 의료 광고를 차단하기 위한 취지로 제정됐다. 법의 취지는 살리되 혁신을 장려하는 방향을 고심해야 한다.

결이 맞지 않는 기존 법에 사업을 끼워 맞추는 관행도 사라져야 한다. PM업계 규제는 상황에 따라 월 단위로 변하고 있다. 기존 도로교통법에 새롭게 등장한 모빌리티 산업을 끼워 넣었기 때문이다. PM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니 전용 도로 논의는 흐지부지되며 차도를 이용해야 함에 따라 안전 문제가 발생한다. 견인료도 경형 승용차와 동일하게 내야 하고, 업계는 지난해 약 10억원의 견인료와 보관료를 낸 것으로 추산했다. 고객은 떠나고 업계엔 빚이 남았다.

일부 혁신 플랫폼은 규제 리스크로 매출 반토막은 물론 투자 보류 등 사업이 존폐 위기에 처했다. 결국 자금력 있는 대형 플랫폼만 살아남게 되는 등 플랫폼 종속성의 심화 우려가 걱정된다. 타다 사태를 통해 적기법이 혁신 서비스의 성장을 저해하고, 결국에는 카카오 등 자본력이 강한 업체만 살아남는 것을 확인했다. 혁신은 경쟁을 활성화하고 서비스 품질을 높이는 촉매제다. 당장 세세한 정보를 오픈하지 않고 서비스를 제공해 온 기존 업계에는 골치 아픈 일이지만 혁신은 서비스 상향평준화의 기회이기도 하다. 가격 비교와 서비스 리뷰가 만인에 노출되니 고객 선택을 받기 위해 가격을 낮추거나 서비스 품질을 높여야 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소비자가 동일한 서비스를 제공해 온 전통 업체를 놔두고 왜 혁신 플랫폼을 택하는지 잊어서는 안 된다. 시장 변화에 대한 이해 없이 낡은 법안을 그대로 확대·적용한다면 정보기술(IT) 강국의 대열에서 밀려나는 건 한순간이다. 혁신 산업이 성장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되 기존 산업군도 혁신이 부족한 부분을 개선할 수 있도록 방향성을 제시해야 한다.

손지혜기자 jh@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