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주 별세] 바람의 나라부터 어린이병원까지..바람같던 'J사장님'의 발자취

[김정주 별세] 바람의 나라부터 어린이병원까지..바람같던 'J사장님'의 발자취
김정주 NXC 대표
김정주 NXC 대표

넥슨 임직원은 넥슨 DNA를 도전과 혁신, 변화라고 규정한다. 김정주 창업주 영향이다. 넥슨은 다양한 도전을 했고 그 과정에서 세계 최초 MMORPG 상용화, 세계 최초 부분유료화, 국내 최초 게임 PPL, 국내 최초 어린이 병원 건립 등 족적을 남겼다.

김 창업주는 개발보다 미래 예측 능력이 뛰어난 사업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인수합병, 투자를 통해 몸집을 불리고 성장동력을 확보했다. 사무실보다는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상식을 벗어나는 시도, 제안으로 판을 짰다. 때로는 파격적인 용인술도 보여줬다.

한국에서 손꼽히는 갑부가 됐지만 그를 아는 이들은 여전히 J혹은 J사장님이라고 부른다. '대한민국 두 번째 갑부' '자수성가의 표본'이라고 기억하기 보단 '블록을 좋아하던 괴짜' '사무실에 없는 사장' '아이와 같은 순수함'으로 기억한다.

김정주 넥슨 창업자는 2014년 NDC서 전길남 교수와 2021년 이광형 교수에게 감사함을 전했다.
김정주 넥슨 창업자는 2014년 NDC서 전길남 교수와 2021년 이광형 교수에게 감사함을 전했다.

“결국 쫓겨서 우리 연구실로 오더라”-이광형 KAIST 석좌교수가 기억하는 제자 김정주

김 창업주는 KAIST 전산학 박사과정을 밟던 1994년 12월 돌연 넥슨을 차린다. 한글과컴퓨터에 다니던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86학번 동기이자 KAIST 기숙사 옆방 친구인 송재경 엑스엘게임즈 대표와 김상범 이오지에프파트너스 대표를 꼬신다.

김 창업주는 박사과정에 별 관심이 없었다. 송 대표가 만든 텍스트머드 '주라기 공원'이 5000만원씩 벌던 시절이었다. 호기심은 인터넷 비즈니스로 향했다. 서울대 재학 중에도 그랬다. 교양 필수 과목대신 교양 과목인 범죄심리학을 들어 학점 미달로 학부 졸업을 못했다. 1년간 선배 회사를 둘러보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사회 경험을 했다. 이 때 경험이 훗날 창업으로 이어진다. 호기심이 매출 3조원짜리 회사가 된 것이다.

당시 KAIST는 창업의 산실이었다. 한국 인터넷의 아버지 전길남 박사와 괴짜 박사로 유명한 이광형 교수 영향을 받았다. KAIST 재학 당시 룸메이트였던 이해진(네이버)을 비롯해 허진호(아이넷), 정철(삼보컴퓨터), 박현제(솔빛미디어), 김영달(아이디스), 신승우(네오위즈), 김준환(올라웍스) 등도 마찬가지다.

당시 벤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낮았기 때문에 자본금은커녕 사무실 임차료조차 구하기 어려웠다. 아버지 김교창 대한 법률구조재단 이사장으로부터 6000만원을 지원받고 송 대표 지인으로부터 IBM을 소개받아 5000만원을 투자 받았다. 당시 IBM은 조직개편이 잦아 김 창업주는 서버, 가구, 집기도 가져올 수 있었다. 김 창업주는 이를 기반으로 연구실에서 나와 역삼역 근방 성지하이츠2차 2009호에 첫 사무실을 차렸다.

바람의 나라 초기 개발자들. 좌측부터 김영구 넥스토릭 대표, 서민 넥슨코리아 대표, 김정주 엔엑스씨 대표, 김진 작가, 송재경 엑스엘게임즈 대표, 김경률 애니파크 실장, 정상원 띵소프트 대표
바람의 나라 초기 개발자들. 좌측부터 김영구 넥스토릭 대표, 서민 넥슨코리아 대표, 김정주 엔엑스씨 대표, 김진 작가, 송재경 엑스엘게임즈 대표, 김경률 애니파크 실장, 정상원 띵소프트 대표

“직접 찾아와 최초로 그래픽을 넣은 게임을 만들고 싶다고 했을 때 세상에서 처음이란 말에 솔깃했다”-만화 '바람의 나라'를 그린 김진 작가에게 바람의 나라 참여 계기를 물었을 때.

김 창업주와 송 대표는 온라인 게임 개념을 구체화했다. 인터넷 혁신 물결은 다음 단계로 진화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송 대표는 게임에 네트워크성을 부여했다. 김 창업주는 자금 조달과 경영을 맡았다. 박정협은 코딩 담당, 박원용은 그림을 그렸다.

개발 중 모자라는 자금은 대기업 웹사이트 구축 하청을 통해 충당했다. 1년간 사회 경험이 도움이됐다. 금방 자리를 잡았다.

1995년 키맨이던 송 대표가 회사를 떠나면서 게임 진척은 느려졌다. 김 창업주는 하청 비딩 중 만난 정상원 진큐어 대표를 영입했다. 정 대표 역시 게임 개발 꿈을 안고 삼성 SDS를 나와 블루버드를 차렸지만 웹에이전시 일을 하며 회사를 운영 중이었다. 김 창업주는 정상원에게 바람의 나라를 보여줬고 1996년 합류한다. 이후 정상원은 2019년까지 사장과 개발총괄 등 개발 주요 보직을 맡으며 넥슨을 이끌었다.

바람의 나라는 1996년 4월 PC 통신을 통해 상용화 서비스를 시작했다. 당시 전화요금은 3분에 20원이었다. PC통신을 이용하면 분당 20원을 추가 과금했다. 느리고 비쌌다. 이용자가 별로 없어 김 창업자와 당시 아르바이트생이자 훗날 넥슨 대표가 되는 서민이 게임 속에서 말을 걸고 함께 놀았다.

한달에 수십만원씩 전화비를 내면서 접속하던 몇 안되던 유저는 게임을 하다 불편한 점이 생기면 바로 개발자에게 이야기했다. 지금도 온라인 게임은 개발자와 이용자가 함께 만드는데 그 시작을 함께 했다. 대한민국 MMORPG 개발과 서비스 조상격이다

세계 최초 그래픽 머드게임 바람의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서비스 중인 온라인 게임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이 때 경험이 제라, 허스키익스프레스 등 실패작을 내면서도 넥슨 DNA인 다양성과 새로운 시도를 계속하게하는 기반이 된다.

바람의나라 원형은 지금과 조금 달랐다
바람의나라 원형은 지금과 조금 달랐다

“같이 일하는 사람과 어울려 새로운 일을 하는 것, 새로운 것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즐겁다”-2012년 토크 콘서트 중

김 창업주는 사람을 보고 활용하는 능력이 있었다. 혁신이 한사람의 천재를 통해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바람의나라 프로토타입 이름이 '둠바스'였는데 당대 유행하던 모든 미래 지배 기술 용어를 하나로 합친 단어였다. 텍스트 머드게임을 그래픽 머드게임으로 전환한다는 생각도 송 대표가 마리텔레콤에서 아르바이트할 때 '단군의 땅'을 개발한 김지호와 같이 떠들던 주제였다. 장인경 마리텔레콤 전 대표가 게임계 대모라 불리는 이유다.

송 대표는 퇴직 후에도 가끔씩 들려 바람의 나라 코딩을 하고 갔다. 송 대표는 코딩하고 서명을 남기는 버릇이 있었는데 지금도 넥슨 클래식 RPG에는 그의 서명이 남아있다. 넥슨 신입 개발자들이 성지순례를 하곤한다.

이 토대를 만든건 김 창업주였다. 김 창업주는 개발자를 수시로 끌고 왔다. 서울대, KAIST 학연이 인재 풀이었다. 후배는 술한잔 얻어먹으러 놀러왔다가 정신 차려보니 컴퓨터 앞에 앉게 된 식이었다. 김 창업주는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문화를 조성했다. 한 번 나갔던 사람도 마찬가지다. 다시 언제든 들어올 수 있는 문화를 조성했다. 지금은 물론 1990년대 후반 기업 오너 경영방식과 대조적이다. 정상원, 이승찬 등 대표급은 물론 팀장급까지 넥슨을 들락거린 경력을 가진 이가 부지기수다.

김 창업주는 '가치투자 전략'이라는 책을 쓴 대학생 두 명에게 100억원을 맡겨 넥슨 초기 자금을 굴리도록 했는데 이들은 현재 3조원을 운용하는 VIP 자산운용 공동대표가 됐다. 평직원이었던 이정헌 대표를 넥슨 코리아 대표에 앉힌 것도 김 창업주의 의중이었다.

바람의 나라도 이렇게 성공했다. 1996년 하반기 바람의 나라 매출은 월 300만원이 되지 않았다. 웹에이전시 조직과 게임개발 조직과 갈등이 생겼다. 웹에이전시 조직은 돈 벌어오니 게임에 쓴다고 불만이었고, 게임개발 조직은 웹에이전시 회사로 정체성이 변하는 게 불만이었다.

지금은 추억이 된 넥슨은 다람쥐를 뿌려라!, 몬스터 젠이 사냥 속도를 따라가지 못 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추억이 된 넥슨은 다람쥐를 뿌려라!, 몬스터 젠이 사냥 속도를 따라가지 못 하던 시절이 있었다

김 창업주는 게임을 택했다. 1997년 1월 바람의 나라를 인터넷에 시범서비스를 시작했다. 1997년 봄 웹에이전시를 이끌던, 훗날 네오위즈를 차리는 나성균, 박진환과 김병관(현 국회의장디지털혁신자문관)이 넥슨을 떠난다. 나성균 빈자리를 현대자동차 홍보팀 출신 윤지영이 매꾸면서 동아리 같았던 회사를 정비하는 기회가 된다. 이어 1998년 들어온 현대자동차 홍보팀 출신 이재교 NXC 대표는 재기발랄하고 엉뚱한 천재들에 반해 넥슨에 합류한다. 김 창업주 복심으로 불리며 20년간 지근거리에서 함께했다.

바람의 나라 인터넷 서비스는 성공을 거뒀다. 유저가 없어 많아 보이게끔 조작하던 게임이 동시접속자가 늘어나 사냥 콘텐츠가 고갈되는 게임이 됐다. 1996년 월 100만원 밖에 못 버는 일도 있던 게임은 1998년 매출 100억원을 기록한다

부분유료화 전후 주고 받은 메일. 이재교 NXC 대표 개인 메일함에서 추출했다
부분유료화 전후 주고 받은 메일. 이재교 NXC 대표 개인 메일함에서 추출했다

“이거 유료화 하자”에서 “공짜로 줍시다. 대신 일부만 뺍시다”-세계 최초 부분유료화 아이템 판매를 앞두고

1998년 넥슨에 병역특례로 들어온 이승찬은 퀴즈게임을 만들고 싶어했다. 그 시절 온라인 게임은 '블록버스터'만 살아남는 시장이라 반응이 미지근했다. 이승찬은 집과 회사를 오가며 친구와 게임을 만들었다.

김 창업주가 이 게임을 발견한 건 1999년이었다. 보자마자 강신철(현 게임산업협회장)을 투입했다. 될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실제 퀴즈퀴즈는 1999년 10월 베타서비스에서 대박을 냈다. 두달 만에 가입자가 100만명을 돌파했다.

예상못한 트래픽에 비용이 늘었다. 김 창업주는 유료화를 추진했다. 정액제만 있던 시절이었다. 이승찬은 반대했다. 여론도 비슷했다. 유료화 전환을 알린 12월 28일에만 831개 상용화 반대 메일이 들어왔다.

바람의 나라 강행으로 성장 기반을 놓은 김 창업주는 이번에도 '고'를 외친다. 2000년 1월 2일 정액제로 전환한다. 2만원도 안되는 금액이지만 캐주얼 게임을 즐기던 일반 대중은 돈을 쓸 준비가 돼있지 않았다. 이용률은 하루 아침에 반토막 났고 게이머 70%가 이탈했다.

김 창업주와 개발팀은 치장 아이템을 구매하기 위해 포인트를 쌓는 이용자 행태에 집중했다. 플레이 콘텐츠를 무료로 풀어주되 치장 아이템만 유료로 팔자는 접근으로 선회했다. 그해 4월 퀴즈퀴즈는 세계 최초로 아이템 판매 부분유료화 모델을 선보인다. 요즘 '인앱결제'로 부르는 모델의 시초다. 세계적으로 추가 결제 상품을 마련한 온라인 게임은 그전에도 몇 있었지만 캐시 아이템으로 통칭하는 구조는 퀴즈퀴즈 원조다.

각자를 표현할 비주얼이 존재한다는 것은 커뮤니티 형성을 뜻했고 현재 메타버스까지 이어지는 개념이다. 판매 한달 만에 매출이 2억원을 넘어섰다. 7월 정액제를 폐지하고 기본 무료 플레이에 아이템 판매 기능만 남겼다.

퀴즈퀴즈는 최초 부분유료화 외에도 최초 타이틀이 많다. 지금이야 일반화된 캐릭터 상품화나 이종산업 간 크로스마케팅도 이 때가 처음이다. 국내 게임으로 처음으로 PPL도 진행했다. 필라, 아트박스, CGV 등 상품 광고를 유치해 간접 광고로 수익을 창출했다.

부분유료화는 2005년 북미 메이플스토리 서비스를 시작으로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현재 전세계 거의 모든 게임이 채택하는 방식으로 자리잡았다.

이정수 전 넥슨아메리카 지사장은 “메이플스토리 미국 론칭 당시 메이플스토리처럼 퀄리티 좋은 F2P 게임 자체가 없었다. 그래서 초반 세몰이를 확실히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디즈니 수준까지 키우고 싶다며 다양한 부문에 투자를 이어갔다
디즈니 수준까지 키우고 싶다며 다양한 부문에 투자를 이어갔다

“우리나라 기업도 좀 더 인수합병(M&A) 시장에 적극적으로 나서면 좋겠다. 투자 대상이 꼭 게임일 필요는 없다”-2014년 스토케 인수 후 한국이 투자시장에서 마이너라며

김 창업주는 인수합병의 귀재로 통한다. 위기 순간마다 해답을 외부에서 찾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인수합병(M&A)과 투자, 이를 통한 인재 영입이다.

김 창업주는 2004년 9월, 병역특례를 마치고 '메이플스토리'를 개발한 이승찬 대표의 위젯을 인수한다. 리니지 대항마로 메이플스토리를 낙점했다. 메이플스토리는 전 세계 60개국에서 서비스 되며 넥슨 전체 게임 중 가장 큰 매출 비중을 차지하는 글로벌 히트작이 됐다.

김 창업주는 메이플스토리에 400억원을 베팅했다. 넥슨이 가진 모든 현금이었다. 지분 교환이 아닌 현금 지급 방식이었다. 넥슨은 2000년부터 상장에 대한 내부 목소리가 높았다. 엔씨소프트, 한빛소프트, NHN, 웹젠이 상장하면서 보상을 받는 것을 보았다.

김 창업주는 상장에 부정적이었다. 김 창업주는 전사 메일을 통해서 3000억원 매출은 돼야 상장할 수 있다고 밝혔다. 개발 독립성이 보장돼야하는 게임회사에서 주주 외압이 게임 개발에 작용하는 걸 염려했다. 이런 상황에서 외부 개발사에 400억원을 사용하니 내부 주요 개발자는 불만이 커졌다. 안에서 열심히 만들어봐야 별 보상을 못 받는다는 인식이이었다. 정상원을 비롯해 지금은 EA에 인수된 제이투엠소프트를 설립한 방경민, 박종흠 등 주요개발자 이탈 원인이라는 게 통설이다. 홍역을 치룬 김 창업주는 마비노기, 카트라이더 흥행 이후 성장 전략을 내부 개발에서 인수로 전환한다.

넥슨은 2008년 네오플의 지분 100%를 3850억원에 인수한다. 김 창업주가 직접 허민 당시 네오플 대표를 찾아가 담판을 졌다. 한국 은행에서 인수에 필요한 현금을 찾을 수 없자 일본에 연락해 돈을 구한 건 업계에 잘 알려진 일화다. 그 만큼 간절했다.

인수 당시 네오플 기업 가치가 고평가됐다는 논란도 있었다. 하지만 2008년 6월 중국에 출시된 던전앤파이터가 대흥행을 기록하며 네오플 매출이 2009년 1559억원으로 수직 상승했다. 후에 던파는 중국 흥행을 기반으로 단일 게임 최초로 매출 1조원을 넘긴 게임이 된다. 2010년에는 게임하이(현 넥슨게임즈)를 인수하며 '서든어택'을 품는다. 여전히 넥슨을 대표하는 스테디셀러다. 2012에는 엔씨소프트 최대주주에 올라서며 미국 게임사 EA 인수에 도전하기도 했다.

김 창업주는 매출 3000억원을 훌쩍넘은 2011년 12월 일본증시에 상장한다. 첫날 시가 총액은 5500억엔, 약 5조7000억원이었다. 일본 증시에 상장한 이유는 위젯과 네오플 등 인수 합병을 통한 성장이 기업가치 증대에 핵심 축으로 작용한 만큼 글로벌 게임사에 대한 M&A 또한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글로벌 무대를 누비는 김 창업주의 천성이 담겨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넥슨은 1997년에 국내 게임업계 최초로 미국 실리콘밸리에 현지법인을 설립했으며 김 창업자 역시 때로는 삶의 거주지를 송두리째 해외로 옮기기도 했다.

인수합병 성공사례에서 알 수 있듯 미래를 보는 눈이 남달랐다. 시장 성장성과 미래 가치를 보았다. NXC에서 2013년부터 인수나 지분 매입 방식으로 기업 30여곳에 투자했다. 상당수가 기존 주력 사업인 게임과는 거리가 멀다. 홍콩의 온라인 레고 거래 중개업체 브릭링크, 노르웨이의 프리미엄 유아용품업체 스토케 등을 인수했다. 암호화폐도 주요 투자 분야다. 국내 암호화폐 거래소 코빗, 유럽 최대 암호화폐 거래소 비트스탬프를 인수했다. 비트코인을 보유하기도 했다. 자회사 아퀴스를 설립해 인공지능(AI)을 이용한 신개념의 투자 서비스를 시도하려고 했다. 항공우주기업 스페이스X나 장난감 제조 업체 하즈브로, 동물용 사료 제조기업 세레레와 아그라스델릭, 의류업체 무스패션, 모빌리티 기업 FGX모빌리티 등에 투자했다. 골프 사업을 추진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물론 성공만 했던 건 아니다. 2011년 룰더스카이 개발사 JCE를 인수하고 이듬해 50% 가량 손해를 보고 매각한다. 2012년 5230억원을 들여 인수한 글룹스는 7년 만에 단돈 1엔에 매각하기도 했다.

[김정주 별세] 바람의 나라부터 어린이병원까지..바람같던 'J사장님'의 발자취

“이곳은 기적의 병원인거 같다. 최선을 다해 더 많은 기적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돕겠다”-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병원 개원 5주년 행사에서

김 창업주는 게임사 사회공헌에 일찌감치 눈을 떴다. 미래 세대를 이끌어 갈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사회공헌 활동에 열정을 보였다. 넥슨컴퍼니와 넥슨재단은 지역사회와 취약계층을 돕는 전통적인 사회공헌을 대규모로 진행하는 동시에 교육·문화·환경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적인 사회공헌 모델을 시도했다.

2013년 아시아 최초로 컴퓨터 박물관인 '넥슨 컴퓨터 박물관'을 비롯해 찾아가는 책방, 코딩 대회 NYPC, 블록놀이방, 게임 문화예술적 가치를 알리는 보더리스 프로젝트 등을 추진했다.

넥슨은 국내 최초 아동 재활병원 '푸르메재단 넥슨 어린이재활병원'과 '대전충남권 넥슨 어린이 재활병원' '경남권 넥슨어린이재활병원' 건립을 위해 500억원 이상을 기부했다. 전국에서 장애 아동 재활 치료에만 집중해 운영되는 어린이 재활병원은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 뿐이다. 일본(200여곳), 독일(140여곳), 미국(40여곳) 어린이 재활병원 수치와 비교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김 창업자는 국내 최초 어린이 완화 의료센터 '서울대학교병원넥슨어린이 완화의료센터' 건립에도 100억원을 기부했다. 3월 둘째 주에 열릴 기공식에는 김 창업자도 참석할 예정이었다.

초기 넥슨에 근무했던 업계 관계자는 “아픈 자녀를 둔 부모의 '우리 애가 웃을 때가 카트라이더 캐릭터들 볼 때 밖에 없어요'라는 한 마디에서 시작됐다”고 말했다.

이현수기자 hsool@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