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미국의 한 디자인 트리엔날레에서는 아주 특별한 과일나무가 전시됐다. 복숭아, 자두, 살구, 체리, 아몬드 등 40가지 과일이 한 나무에 열리는 '40개 과일나무'(Tree of 40 Fruit)가 바로 그것이다. 접목 방식을 이용한 이 나무에는 모든 가지에 각각 다른 품종이 자라났다. 실제 과실수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환경과 기후변화로 인한 식량부족 등 다양한 의미를 담아 정원수용으로 길러졌다. 뉴저지, 매사추세츠, 캘리포니아 등 미국 전역에 16그루가 있다.
이 놀라운 나무를 선보인 샘 밴 아켄(Sam Van Aken) 시러큐스대 교수는 테드(TED)를 통해 “각각의 과일에는 인류의 문화가 담겨 있다. 과일은 단순한 식품 이상으로, 인류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하나의 나무에서 40개 과일을 각각 품고 자라나는 나무라니. 어쩌면 각자 희망·꿈·목표가 있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하나의 국토, 즉 한 국가를 닮았다고도 생각할 수 있겠다.
인간이 국가를 형성하게 된 것은 여러 기후와 자연현상 속에서 생존하기 위한 일종의 생존전략이다. 플라톤의 주장을 보면 “나라가 생기는 것은 우리 각자가 자족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가 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국가가 욕망이 각자 다른 인간의 집합인 만큼 이를 통제하기 위한 '올바름'(dikaiosyne)이라는 질서도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하지만 인구가 늘고 현대에 들어와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이 질서 역시 훨씬 정교해지게 됐다. 또 욕구와 필요성이 서로 충돌하는 과정에서 사회는 때때로 분열하고 분쟁에 이른다. 우리나라는 안타까운 근현대사를 바탕으로 해서 급격한 속도로 발전한 나라다. 세계를 통틀어도 이 같은 발전 속도를 찾아보기는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반대급부로 공정성과 국민통합이라는 과제는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상태다.
두 과제는 공교롭게도 과학계가 숙명처럼 안고 있는 두 과제와도 같다. 하나는 합리성, 다른 하나는 학문 융합이다. 과학 분야에서의 합리성은 흔히 객관성과 재현성(replication)이 담보되어야 한다고 본다. 객관성은 충분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문학이 아닌 한 모든 학문의 이론은 이를 뒷받침할 데이터와 근거가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 데이터가 없는 이론이란 단순히 주장이나 망상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과학적 합리성이란 말은 객관성으로 대변되기도 한다.
지금 우리 사회가 당면한 가장 어려운 숙제인 '공정한 사회 만들기'는 이 과학적 합리성이 바탕으로 되어야 한다. 논란이 일어나는 불평등과 공정성 이슈를 살펴보면 많은 의사결정이 경험적 판단이나 직관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자연히 의사결정에서 누락 집단 입장에서는 불공정성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데이터나 숫자가 사회 일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수단이 아니라는 편견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순히 데이터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분석과 해석을 바탕으로 한다면 첨예한 갈등 속에서도 현명한 의사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다. 여기에는 데이터 수집자와 분석자의 높은 윤리성이 전제돼야 하고, 도출된 데이터를 보는 국민의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융합의 중요성은 현대에 들어와 더욱 커졌다. 예를 들어 의료 분야는 생명과학이나 의학만으로 충분했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은 다르다. 인류의 기대수명이 길어지고, 새로운 질병이 발생하고, 장수와 건강이 인류의 주된 관심사로 떠오르면서부터 변화는 시작됐다. 기계공학자가 3D프린터로 인공장기를 만들고, 의사는 인공지능과 빅데이터를 통해 한 사람에게 생길 수 있는 질병을 찾아낸다. 비단 과학이 아니더라도 사회적인 문제 역시 물리학이나 수학으로 풀어내는, 이른바 경계 없는 학문 시대는 오래전부터 다가와 있었다.
하지만 이 역시 각 학문에 있는 접근법이나 연구 방법의 차이, 소통의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아주 순탄하게 진행된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사회 통합도 마찬가지다. 사회의 일부에 불과한, 심지어 목적이 비슷한 집단이 수행하는 학문에서도 융합을 이루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이보다 복잡한 사회는 어떻겠는가. 개개인 혹은 집단의 배경과 환경이 전혀 다른데 소통까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사회적 통합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지난주 새 정부가 그 시작을 알렸다. 코로나19 확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경제문제, 높은 실업률, 지역 소멸 위기까지 많은 과제가 산적해 있는 상태다. 이 가운데 가장 우선시해야 할 것은 결국 공정성 확보와 사회 통합이 아닌가 한다. 서로 다른 40개의 과일이 하나의 식물이었던 것처럼 한 나무에서 자라기까지는 번거로운 작업이 필요하다. A라는 나무에서 가지를 잘라내 B란 다른 나무에 가지를 접붙여서 기르고, 다듬으며 열매를 수확할 수 있는 한 그루의 새로운 나무가 될 때까지 그 바탕에는 수많은 공부와 실패가 있었을 것이다. 실제 나무를 처음 선보인 밴 아켄 교수는 9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접목이라는 방식이다. 접목은 유전적 차이가 극명하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40개의 서로 다른 과일이 한 나무에서 열매를 맺기도 어려운데 이 종들 사이에도 유전적 유사성이 있어야 한다. 물론 이 과일들이 각자 잘 자라날 수 있도록 과일에 필요한 각각의 보살핌도 있었을 것이다.
5000만명의 인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발전에는 분명 이보다 더 큰 노력과 공이 필요하다. 새로운 정부가 데이터를 근간으로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 가며, 서로 다른 개인과 계층·집단 간의 통합을 이루어서 5000만개의 꿈과 미래가 풍요롭게 피어날 미래가 다가오길 기대해 본다.
김무환 포스텍 총장 president@postech.ac.kr
필자...
김무환 총장은 포스텍(POSTECH) 설립 직후인 1987년 포스텍 기계공학과 교수로 부임한 이래 학생처장, 입학처장, 기획처장을 두루 맡으며 교육과 대학경영을 주도해 왔다. 원자력안전기술 분야 전문가로서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 원장. 국제원자력안전기구(IAEA) 사무총장 자문기구인 국제원자력안전위원회(INSAG)의 한국 대표위원 등을 역임했다. 2019년 9월 포스텍 8대 총장에 취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