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물도 없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면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겪은 사람이다. 당신에겐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우리 조상은 국을 많이 먹었다. 음식이 귀한 시절에 고기나 나물을 불린 물이라도 많이 먹고자 했다. 국물이라도 먹겠다며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가. 6·25 전쟁 당시 난민시설에서 밥때가 되면 '개판 5분 전'이라는 말을 외쳤다. 솥뚜껑을 열기 5분 전이라는 뜻이다. 순식간에 사람이 몰려들어 아수라장이 되곤 했다. 지금은 어떤가. 국물이 있던 자리를 고기, 나물, 해산물이 빽빽이 채우고 있다. 풍요로운 시대다.
조선 말 프랑스 선교사 샤를 달레 신부는 조선인의 폭식을 언급했다. 빈부와 신분을 떠나 많이 먹었다. 음식의 질보다 양을 중시했다. 많이 먹기 위해서인지 식사 도중에는 말이 없었다. 조선의 대식 풍습은 선교사, 외교사절의 기록과 사진으로 알 수 있다. 어머니는 아이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밥을 먹였다. 숟가락으로 아이 배를 두드려 보고 팽팽하면 그쳤다.
음식을 주제로 드라마 '대장금', 예능프로그램 '맛있는 녀석들' '한끼 줍쇼' '백반기행' 등 다양한 방송프로그램이 있다. 그 정도는 그러려니 했다. 구글 유튜브 등 온라인 동영상을 보면 유독 먹는 것을 보여 주는 방송(먹방)이 많다. 폭주하고 있다. 구독, 조회 수가 높다. 고급 맛집을 찾는 먹방, 허름한 맛집을 찾는 먹방, 예능·여행과 결합한 먹방 등 종류도 다양하다. 놀라운 것은 많이 먹는 대식(大食) 먹방이다. 쯔양, 현주엽 등 주로 개인을 내세운 온라인 방송이다. 조회 수는 상상을 초월한다. 수백만에 이른다.
모든 것이 풍족한 디지털시대에 먹방의 인기 비결이 궁금하다. 원시시대엔 먹을거리를 찾는 것이 중요한 일이고, 또 위험한 일이었다. 뭔가 움직인다면 사람을 긴장시킨다. 근육과 뼈가 단단한 동물인 경우엔 빨리 도망치지 않으면 자신이 먹이가 됐다. 나보다 약한 경우엔 빨리 낚아채지 못하면 굶어야 했다. TV는 왜 보는 걸까. 좋은 정보를 얻거나 오락을 위해서다. 그것뿐일까. TV를 켜면 움직이는 것이 나온다. 경계를 늦추지 않는 본성 때문인지 모른다. 움직이는 것에 눈이 간다. 물론 TV엔 사악한 사람이나 동물 등도 많이 나온다. 그러나 TV 밖으로 돌진해서 나를 공격하진 않는다. 안전하다. 원시시대부터 산업화가 이뤄진 1970년대까지 먹을 것 자체가 귀했다.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야 했다. 지금은 바빠서 끼니를 놓치긴 해도 먹을 것이 없어서 끼니를 놓치진 않는다. 먹방에 눈길이 가는 건 오랜 유전적 흔적일까. 그렇게 보기엔 석연찮다. 비만을 혐오하는 시대다. 고령화로 가면서 건강을 강조하는 시대다. TV를 틀면 시도 때도 없이 건강정보가 쏟아진다. 비타민, 영양제, 건강식품도 인기다. 요가, 피트니스센터는 만원이다.
다이어트 핑계로 직접 먹지는 못하면서 많이 먹는 유튜버를 보며 대리만족을 느낀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아름다움보다 밖으로 보이는 외모에 신경 쓰는 사회다. 취업하려면 외모가 좋은 사람이 유리하다. 외모가 경쟁력이 되는 사회다. 비만은 위험하다. 그러나 먹는 것은 사람의 대표 욕구인 의식주 가운데 하나다. 집을 사고 싶은 욕구, 인정받고 싶은 욕구, 명예를 얻고 싶은 욕구 등 다른 욕구들은 충족시키기 어렵다. 그렇기에 비교적 쉬운 식욕에서 만족을 얻으려고 먹방으로 몰리는 걸까. 많이 먹는 것이, 그것을 즐겨 보는 것이 범죄는 아니지만 허용된 탐욕치곤 지나치다.
위장의 한계에 도전하는 먹방을 볼 때마다 안쓰럽다. 그걸 보고 안쓰러워하는 나도 안쓰럽다. 구독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예능프로그램 '맛있는 녀석들'의 주연 유민상에게 물었다. 맛이 없는데 맛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냐고? 그의 답이 걸작이다. “우리가 맛없다고 하면 믿으시겠어요?” 먹방이 나쁜 콘텐츠는 아니다. 그들의 건강에 문제가 없길 바랄 뿐이다.
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나는 인공지능을 변호한다' 저자) sangjik.lee@bk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