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디지털 통상시대, 현장 목소리 담아내야

[ET시론]디지털 통상시대, 현장 목소리 담아내야

“기업은 올림픽 국가대표…모래주머니 달고 메달 못 따.” 당선 12일 만인 3월 21일, 윤 당선인이 기업인과 오찬에서 민간 주도 경제성장을 약속하며 한 발언이다. 기업이 앞장서서 경제를 견인하고 정부는 뒤에서 신산업 육성에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하고 불필요한 규제를 혁파해야 한다는 취지다. 신산업 육성과 규제 타파를 논의하면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이 바로 '통상'이다.

주요 국가가 자국 중심의 강력한 산업정책을 추진하고 그 일환으로 디지털, 기술규제 등 산업과 밀접한 실물 경제형 통상정책을 펼치기 때문이다. 국제 흐름에 맞서 우리 기업이 한 걸음 더 성장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려면 통상과 실물경제의 유기적 협업이 필수 요소이다. 2013년 이후 통상기능이 기업현장 목소리를 담을 수 있는 산업부로 오면서 △한-중 FTA 및 RCEP 성공 타결과 세계 GDP의 85%까지 FTA 네트워크 확대 △코로나 위기에도 수출·무역액 사상 최대치 달성 △日 수출 규제와 공급망 위기에 성공 대응 △대미 세탁기 분쟁(2019년 2월), 대일 수산물 분쟁(2019년 4월) 등 다수의 WTO 통상분쟁 승소 △통상산업포럼·FTA 유관기관 협의회 운영 면에서 큰 성과를 달성했다.

통상환경 변화, 디지털 전환에 따른 통상 전문화

통상의 핵심은 변화 흐름을 읽고 발 빠르게 대응하는 것이다. 50여년 전 우리나라는 WTO 무역자유화라는 흐름 앞에서 시장개방을 선택했고 그 결과 2021년 전자IT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 최대 수출실적을 경신했다. 최근 글로벌 통상환경은 미중 경쟁 가열, 팬데믹 위기 속에서 '경제 안보' 시대로 돌입했다.

첨단기술을 둘러싼 미·중 경쟁, 코로나19와 러-우크라이나 사태 등으로 공급망 위기가 상시화되고 경제와 안보 접점이 확대되는 추세에서 공급망·과학·기술·사이버보안·에너지·무역 등 경제 전 분야를 포괄하는 경제가 국가안보 핵심축으로 부상했다. 공급망·과학기술·에너지 등 실물경제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 없이는 경제 안보를 수호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코로나19 확산이 세계적으로 디지털 전환을 촉진하면서 디지털 역량 강화와 디지털 무역 확대는 지체할 수 없는 과제가 됐다. 디지털 전환에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다. 미국이 최근 추진 중인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핵심은 디지털 의제다. IPEF 구상안을 살펴보면 기업의 디지털 역량을 강화하고 디지털 무역을 활성화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일본, 싱가포르, EU 등도 앞다퉈 디지털 협정을 체결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디지털경제통상과를 신설하고 싱가포르와 디지털협정(DPA)을 타결하는 등 새로운 물결에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디지털경제동반자협정(DEPA),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IPEF 등 디지털 분야에서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다. 디지털은 새롭게 등장한 의제인 만큼 관련 규범이 정비되는 과정에 있다. 우리가 국제 사회에서 목소리를 낼 여지가 많고 전자IT 강국으로서 우리 입장이 충분히 반영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결국 기업이 필요로 하는 디지털 규범이 무엇인지 가까이에서 듣고 반영할 수 있는 이해력이 필요하다. 실물경제에 대한 전문성을 갖춘 부처가 통상을 다루어야 하는 이유다.

기술 통상 대응을 위한 통상 거버넌스

포스트 코로나 시대 통상에서 디지털 못지않게 중요한 부분이 기술이다. 산업 수요에 기반해 핵심기술을 선제적으로 확보하고 해외 기술규제에 대응할 방안을 모색하는 것은 통상의 핵심 임무가 됐다. 다자·양자 무역협정을 통해 시장을 상당 부분 개방한 국가가 국가안보 등 이유를 내세우며 기술장벽을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바이든 정부와 EU는 무역 첨단기술 협력 확대 채널인 무역기술위원회(TTC)를 신설하는 등 대응 체제를 강화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첨단기술을 확보하고 해외 기술 규정과 표준이 불필요한 무역장벽으로 기능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경제 안보 시대에 기업 이익을 수호하고 국가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관련 규정이 국내에 미칠 영향을 볼 수 있는 거시적인 시야가 필요하다. 실물경제에 대한 이해 없이는 통상이 반쪽짜리로 기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주요국에서 통상 교섭기능은 주로 산업 또는 외교부처에서 담당하고 있다. 다만 최근 자국 중심 글로벌 공급망 재편, 첨단기술 경쟁, 급격한 디지털 경제 전환, 탄소중립 이행 가속화 등 상황에 대응하여 산업부처 주도형(산업통상형) 국가가 증가하는 추세이며 독립기관에서 통상을 수행하는 경우에도 산업부처와 독립 통상기관 간 긴밀한 협업 하에 업무를 수행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세부 수치를 보자면 특수한 통상구조를 가진 EU를 제외하고 G20 국가 중 9개국(남아공·러시아·멕시코·브라질·사우디·인도·일본·중국·한국)이 산업통상형 조직을 둔 반면에 3개국(아르헨티나·캐나다·호주)만이 외교통상형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 10대 경제 대국 중에서도 4개 국가(중국·일본·인도·한국)에서 산업부처에서 통상업무를 수행하는 반면에 1개 국가(캐나다)만이 외교부처에서 통상을 다루고 있다.

양적 비교를 넘어 우리나라와 유사한 산업구조를 가진 국가에서 어떤 식으로 통상 거버넌스를 구축하였는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는 제조업 강국이자 수출 중심 산업 구조를 갖는다. 세계 10대 제조업 강국 중 미국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중국·일본·한국·스위스·대만·싱가포르)는 모두 산업통상형 거버넌스를 채택하고 있다. 수출을 기준으로 살펴보더라도 상황은 비슷하다. 10대 수출 강국 중 3개국(중국·일본·한국)이 산업통상형 조직을 채택한 반면에 1개국(캐나다)만이 외교통상형 조직을 유지하고 있다.

국가성장 핵심 통상 '산업과 함께 가야'

국내 무역진흥·통상협력 등 핵심 통상기능은 개국 이래 산업부에서 지속 수행해 왔으며 국제환경변화에 발맞춰 산업계 의견수렴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당선인이 강조한 민간 주도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50년간 국내 경제를 주도한 기업 현장 목소리를 귀담을 필요가 있다. 한국산업연합포럼이 수출·제조 기업과 회원단체 대상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 87.1%(108명)가 통상정책업무를 산업통상자원부에 존치해야 한다고 응답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금까지의 통상이 시장 개방을 주된 목표로 삼았다면 앞으로 통상은 디지털·기술 등 산업 정책 일환으로 수행될 가능성이 높다. 산업과 밀접한 통상 의제가 대두되고 있는 시점에서 산업과 통상 분리가 논의되고 있음에도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산업 현실과 유리된 통상이 아닌 현장 목소리를 듣고 소통하는 전방위 경제협력형 통상이 되기를 희망한다.

박청원 한국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 상근부회장 cwpark9@gokea.org

< 국내 통상조직 변천사>

<프로필>

박청원 부회장은 부산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밴더빌트대 경제학 석사, 건국대 공학(신기술융합)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제27회 행정고시 합격을 통해 공직자에 입문, 산업통상자원부 기획조정실장, 산업정책실장, 대변인, 방위사업청 차장을 지냈다. 제7대 전자부품연구원(KETI) 원장, 건국대 특임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KEA) 상근부회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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