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정말이야.” 1972년 9월 2일. 한국과학원(현 KAIST)이 1973년도 학생모집 요강을 발표하자 국민 반응은 놀람 그 자체였다. 과학원은 요강에서 모든 학생에게 학비 면제와 장학금 지급, 기숙사 제공, 여기에 병역특례까지 준다고 밝혔다. 당시 이 같은 특전을 주는 국내 대학이나 대학원은 한 곳도 없었다.
1970년대 대학가에는 우골탑(牛骨塔)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농촌 부모들이 자식을 공부시키기 위해 재산목록 1호인 소를 팔아서 자식을 대학에 보내던 시대상을 반영한 말이다. 그런 시절에 특전 세트에 더해서 학생 전원에게 월 2만원 장학금 지급은 상상을 초월하는 혜택이었다. 더한 파격은 병역특례 조치였다. 병역특례는 학생들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10주 이내 군사훈련 소집 교육만으로 병역을 마친 것으로 처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대신 졸업 후 연구소나 산업현장 등에 일정 기간 근무토록 했다. 당시 엄중한 남북 대치 상황에서 병역특례는 군미필 젊은이에게 가장 큰 특전이었다.
특전과 병역특례는 전국 수재들이 앞다퉈 한국과학원으로 몰리는 촉진제 역할을 했다. 정근모 전 과학기술처 장관(당시 과학원 부원장)의 증언. “당시 학생들에게 학비 면제는 물론 장학금으로 월 2만원을 지급했다. 나중에 박사과정을 도입한 뒤에는 월 3만원을 학생들에게 지급했다. 당시 과학원 조교수 월급이 10만원 정도였다. 정부가 얼마나 정성을 쏟았는지를 보여 주는 단적인 일이다. 그만큼 정부는 과학기술 발전과 미래 과학인재 양성에 최선을 다했다.”
과학원은 모집 요강에서 신입생은 필기시험과 면접시험으로 선발키로 했다. 입학 원서는 1972년 12월 12일부터 교부하고 원서 접수는 12월 22일까지 하기로 했다. 1차 필기시험은 이듬해인 1973년 1월 15~16일 이틀간 실시하고 1차 합격자는 1월 22일 발표키로 했다. 2차 면접시험은 1월 24~27일 나흘 동안 실시키로 했다. 최종 합격자는 2월 1일 발표한다고 밝혔다. 과학원은 신입생 가운데 40%는 산업체, 학교, 연구기관 근무자를 뽑기로 했다.
과학원은 1973년 1월 전기·전자공학과 등 7개 학과장을 임명했다. 기계공학과장은 이정오 박사, 생물과학과장 박무영 박사, 산업공학과장 이남기 박사, 수학·물리학과장 이상수 박사, 재료공학과장 천성순 박사, 전기·전자공학과장 박송배 박사, 화학·화학공학과장 전학재 박사 등이었다. 이정오 박사는 한국과학원장, 한국과학기술연구소장, 과학기술처 장관을 역임했다. 이상수 박사는 한국과학원장을 두 차례 역임했고, 천성순 박사도 한국과학기술원장을 지냈다. 전학재 박사는 한국과학기술원장과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일했다.
첫 신입생 입학시험은 영하의 날씨 속에 1월 15일 치렀다. 당시 과학원은 자체 교실을 신축하기 전이어서 인근 경희대 공학관을 빌려 시험을 치렀다. 응시자는 총 549명이었다. 과학원 교수들이 경희대 교수들의 도움을 받아 시험감독을 했다. 과학원은 필기시험으로 영어, 기초, 전공 등 세 과목을 치렀다. 1차 필기시험 결과는 놀라웠다. 전국 수재가 몰린 탓에 1점 차이로 450명이 합격선에 든 것이다. 점수만으로는 합격 여부를 가리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박달조 당시 원장은 “지원자 모두를 선발할 수는 없겠느냐”고 말할 정도였다. 박 원장은 최형섭 당시 과학기술처 장관에게 “미국에서도 이렇게 우수한 학생들은 드뭅니다. 모두 합격시키시지요”라고 건의했다. 최 장관의 생각은 달랐다. 최 장관은 대학이나 대학원 교육은 양보다 질을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 같은 소신에 따라 소수 정예를 강력히 주장했다. 최 장관은 과학원 전무식 당시 교무처장에게 “엄격한 시험관리를 하고, 만약 우리가 생각한 수준에 미달하면 한 명도 뽑지 않아도 좋다”고 지시했다.
최형섭 전 장관의 회고록 증언. “내 소신은 고급 두뇌는 양보다 질이었다. 다수를 평준화하는 것보다 소수를 정예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1차 필기시험에서 과학원은 231명을 선발했다. 2차는 이들을 대상으로 면접시험을 봤다. 면접시험은 당시 국내 첫 도입이었다. 학과 교수 전원이 참석해 한 사람당 1시간여에 걸쳐 심층면접을 실시했다. 송곳 면접에 수험생들은 진땀을 흘렸다. 긴장감 속에 졸도하는 수험생도 나왔다. 과학원은 2월 1일 6개 학과 합격자 106명을 발표했다. 평균 5대 1의 경쟁률이었다. 이들은 한국 과학기술의 미래를 책임질 동량(棟梁)이었다.
인터뷰/나정웅 과학원 전기·전자공학과 1호 교수
나정웅 박사는 한국과학원(현 KAIST) 전기·전자공학과 1호 교수다. 정근모 당시 부원장의 권유로 한국과학원 설립 교수에 부임했다. 3개월여 동안 학과 개설을 위한 조사활동 간사로 참여해서 전기·전자공학과를 개설했다.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과 개발한 연속 전자파 지하 레이더를 이용해 제4 땅굴을 발견, 한국 과학기술의 위상을 과시했다. 광주과학원장을 거쳐 40여년 동안 KAIST 교수로서 후학을 지도했다. 현재 KAIST 명예교수와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이다. 그는 최근 학술원 학술연구총서로 '그 시대의 공학문제에 도전하다'를 펴냈다. 나 박사는 최근 제주에서 1개월 지냈다. 다음은 나 박사와 나눈 전화 인터뷰 내용이다.
-과학원 설립 교수로 부임한 계기는.
“정근모 전 과학기술처 장관의 권유로 왔다. 정 전 장관이 과학원 부원장으로 임명되자 함께 한국으로 가서 후학들을 지도하자고 (나에게) 권했다.”(나 박사는 광주제일고와 서울대 공대를 수석 졸업하고 미국 뉴욕대 브루클린공대 대학원에서 전기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과학원장 시절 전 과목을 영어로 강의했고, 석·박사 논문도 영문으로 작성토록 했다.)
-학과 개설은 어떻게 준비했나.
“사전에 3개월여 동안 타당성 조사를 했다. 당시 전기·전자공학과 설립 조사단의 책임자는 박성배 박사였다. 나는 간사로 참여했다. 교육방식은 철저하게 미국식을 채택했고, 강의와 실습 위주로 교육했다. 강의 위주인 한국 교육과는 달랐다. 관건은 졸업생 취업이었다. 2년 후 졸업했는데 취업하지 못하면 큰일 아닌가. 산업체, 연구소, 학교 등을 대상으로 과학원 졸업생을 채용할 용의가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조사했다.”
-신입생 선발은 어떻게 했나.
“1차 서류 전형과 2차 면접으로 선발했다. 면접시험은 국내 최초였다. 당시 국내 대학은 점수로 학생을 선발했다. 과학원은 1차 필기는 기초를 보기 위한 것이고 진짜는 2차 면접이었다. 교수진이 면접장에 다 들어가서 각자 질문하고, 대답을 듣고, 각자 점수를 매겼다. 부정을 막기 위해 교수가 채점한 점수를 평균 내어 입학생을 선발했다. 한 사람당 1시간 정도 면접을 했다. 면접 도중에 너무 긴장해서 졸도하는 학생도 있었다.”
-학생들 교육 과정은.
“강의와 실험을 병행했다. 전문지식은 엄격하게 지도했다. 학생들에게 과제를 많이 냈다. 당시 교수 아파트와 학생 기숙사가 학교 안에 있어서 밤낮이 따로 없었다. 학생들이 가장 힘들어한 게 실험이었다. 매일 실험했다. 학생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
-제4 땅굴은 어떻게 발견했나.
“그 일은 이야기가 길다. 학생들 석사논문으로 마이크로웨이브를 이용한 전자레인지 원리를 연구했다. 강원 철원 제2 땅굴은 지하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우연히 발견했다. 이후 전자파로 땅굴을 발견해 보자는 제안을 받았고, 육군 용역사업으로 땅굴 탐사에 나섰다. 이후 학생들과 함께 개발한 '연속 전자파 지하 레이더'로 1989년 12월 제4 땅굴을 발견했다. 땅굴 발견 발표 시 국방부가 핵심 역할을 한 과학원과 과학기술처에 관해 언급하지 않고 민간의 도움을 받았다고만 했다. 이에 과학기술처 지시로 내가 별도로 기자회견을 했다. 안보 문제여서 극히 조심스럽게 강의하듯 땅굴 발견 경위를 밝혔다. 모든 언론이 이튿날 사회면 머리기사로 땅굴 발견 경위를 크게 보도했는데 기자들이 민감한 안보 문제를 건드리지 않아서 뒤탈은 없었다. 미국도 인정한 한국 과학기술의 쾌거였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