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거시경제 불확실성 심화로 벤처투자가 위축됨에 따라 국내 벤처업계가 긴장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 미국의 빅스텝(기준 금리 0.5% 포인트 인상) 등으로 글로벌 벤처투자가 올 1분기 꺾이면서 우리나라도 시차를 두고 투자가 쪼그라들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올해 들어 잇따른 기업공개(IPO) 철회와 까다로워진 상장심사 탓에 후기투자(시리즈C~G) 심리가 위축됐고 초기투자(시리즈A·B) 역시 모태펀드 예산 감축 등 영향이 나타나는 내년부터 하락세를 보일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시장조사업체 CB인사이츠에 따르면 올 1분기 글로벌 벤처캐피털(VC) 펀딩 규모는 1439억달러(약 182조원)로, 전 분기 대비 19% 감소했다. 세계 최대 투자 시장인 미국도 1분기 투자가 줄었다. 시장조사업체 피치북에 따르면 1분기 미국 벤처투자 규모는 전 분기 대비 26% 감소한 707억달러(89조4000억원)였다. 같은 기간 거래 횟수는 4822건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는데, 이는 거래 당 투자금액이 줄어들었다는 의미다.
더욱이 기업공개(IPO) 건수도 올 1분기 28건에 그쳤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의 공격적 금리 인상, 인플레이션, 중국의 코로나19 봉쇄 조치 등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스타트업 투자금 회수(EXIT) 활동이 주춤하는 것이다.
한국은 아직까지 글로벌 시장 영향이 직접적으로는 반영되지 않는 분위기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올 1분기 벤처투자와 펀드결성 금액이 나란히 2조원을 돌파하며 사상 최대치를 달성했다. 벤처투자 2조827억원, 펀드결성 2조5668억원을 기록했다. 벤처투자는 종전 역대 최대인 지난해 1분기(1조3187억원)보다 57.9% 늘어났다. 펀드 결성액은 전년 동기(9905억원) 대비 62.8% 증가했다. 투자 건수(1402건), 건당 평균 투자액(14억9000만원) 등도 역대 최대 기록을 갈아치웠다.
다만 앞으로도 국내 벤처투자 열기가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올 상반기 투자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추진된 결과로 봐야 한다는 분석이다. 사상 최대 규모로 펀드가 결성된 만큼 투자처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글로벌 시장 위축과 대외여건 악화 영향이 실제 투자 수치로 나타나기까지는 시차가 발생한다.
벤처캐피털협회 고위 관계자는 “글로벌 영향이 있겠지만 한국은 지난해 (펀드 결성을 통한) 투자금이 많이 확보됐고 1분기에도 펀드가 많이 결성돼 아직 우려할 상황까지는 아니다”면서도 “결국 회수시장이 중요한데, 바이오 산업이 위축되고 기술특례 상장 요건이 강화돼 향후 투자는 신중하게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투자업계 시각도 비슷하다. 국내 한 VC 대표는 “상반기 투자가 많이 이뤄졌지만 전반적으로 투자를 보수적으로 바라보려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다른 VC업계 관계자는 “아직 투자전략을 수정할 단계는 아니다”라면서도 “IPO가 이뤄지지 않고 부정적 요인이 많아 투자 심리가 위축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VC 업계는 IPO 철회 등 회수시장이 얼어붙으면서 후기 투자가 영향을 받을 것으로 내다봤다. 이번 달에만 SK쉴더스를 시작으로 원스토어(11일)와 태림페이퍼(11일)까지 상장을 철회했다. 올해 들어 IPO를 중도 포기한 회사가 6곳이나 된다. 오는 8월 기술특례상장 문턱이 높아질 예정이어서 벤처투자를 이끌었던 바이오를 중심으로 IPO 시장은 더 가라앉을 전망이다.
주식시장 폭락도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우려된다. 상장사 가치평가(밸류에이션)가 하락하면서 비상장사인 벤처투자 매력도 떨어져서다. 또 다른 VC업계 관계자는 “소수의 톱(Top)급 딜(Deal)이 아니면 펀딩조차 힘들어 질 수 있다”고 말했다. 다른 VC 대표는 “벤처투자는 대부분 컨소시엄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시장이 꽁꽁 얼어붙은 상황에서 한 회사 단독으로 투자를 진행할 수 없다”면서 “'기업가치 떨어졌을 때가 투자 호기'라는 말이 통용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장기적으로는 초기 투자도 안심할 수 없다는 분석이다. 민간 벤처투자 마중물 역할을 하는 모태펀드 예산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올해 중기부의 모태펀드 출자예산은 5200억원으로, 지난해 7200억원보다 대폭 줄었다. 기존에 결성된 펀드가 있어 모태펀드 예산 삭감 영향이 올해 당장 발생하지는 않겠지만, 향후 투자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
'제2 벤처붐'을 이어갈 수 있는 열쇠가 새 정부 정책 방향에 달렸다는 평가도 나온다. 실제로 업계는 윤석열 정부가 어떤 정책을 펼치고, 시장에 어떤 영향을 줄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윤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벤처투자 활성화 의지를 천명했다. 실제 윤석열 정부 110대 국정과제에 '벤처투자 활성화'가 포함됐고 오는 2027년까지 모태펀드 규모를 대폭 확대해 세계 3대 벤처 강국을 만들겠다는 청사진도 제시했다.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7조원을 돌파한 벤처투자를 2배 이상 끌어올리겠다는 방침이다. 또 인수·합병(M&A) 투자 제한 완화 등을 통해 벤처투자 생태계를 고도화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박하진 HB인베스트먼트 대표는 “(투자업계가) 새 정부 정책을 지켜보는 상황”이라며 “부동산 투자보다 벤처투자 수익성이 높다고 본 개인 투자자 유입도 주춤한 상태여서 세제지원 강화 등을 통해 벤처투자를 장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재학기자 2jh@etnews.com